[라동철 칼럼] 중대재해처벌법 취지 훼손 안 된다

국민일보

[라동철 칼럼] 중대재해처벌법 취지 훼손 안 된다

입력 2022-10-12 04:20

산재 사망 사고 빈발 여전한데
재계는 경영책임자 처벌 완화
촉구하고 여권은 동조 움직임

엄정 집행과 기업 예방 활동
지원 확대로 법 안착 유도해야
입법 취지에 반하는 개악 안돼

안전 투자 확대는 필수라는
경영 인식 자리 잡아야 '산재
공화국' 오명 벗을 수 있을 것

우리나라는 산재 공화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을 정도로 산업재해로 인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는 국가다. 노동자 1만명당 산재 사망자 수인 사고사망만인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에 든다. 이 수치가 줄어드는 추세지만 지난해에도 산재 사고 사망자가 828명이나 됐다. 하루 2.3명꼴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지난 1월 27일부터 시행됐지만 아직 기대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이 법 시행 이후 지난달 30일까지 약 8개월 동안 443건의 중대재해가 발생해 446명이 사망했다. 법을 적용 중인 상시 노동자 50인 이상(건설업은 공사금액 50억원 이상) 사업장에서 156건(35.2%)이 발생해 165명이 숨졌다. 사망자의 65%(107명)가 하청 업체 소속이었다. 지난달 26일 발생한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화재 참사 희생자 7명도 모두 하청·용역 업체 직원들이었다. 법 적용이 유예됐거나 면제된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64.8%인 287건(사망 281명)이 발생한 것까지 감안하면 소규모 사업장과 하청 업체 노동자들이 산재 사망 사고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중대재해를 예방하고 시민과 종사자들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취지에서 제정됐다. 사망 사고나 업무에 기인한 집단 발병 등 중대재해 발생 시 사고 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하청노동자가 사망하더라도 현장 관리에 실질적 책임이 있는 원청 업체의 경영책임자에게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것도 핵심이다. 기업의 최종 결정권자에게 안전을 제대로 챙기도록 유인함으로써 산재 예방의 실효성을 높이려는 장치들이다.

재계는 경영책임자를 과도하게 처벌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법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표이사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면제할 수 있도록 경영책임자의 대상과 범위를 구체화하는 내용의 시행령 개정을 정부에 촉구했다. 국민의힘도 재계의 의견을 반영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이 산업통상자원부나 고용노동부 장관 등과 협의해 중대재해 예방 기준을 고시하고, 작업환경에 관한 표준 적용 노력을 인증받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 대해 형량을 감경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박대출 의원이 발의했다.

재계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처벌 만능주의에 치우쳤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 중대재해가 발생했다고 사업주가 반드시 처벌되는 게 아니다. 중대재해의 인과 관계, 사업주의 안전 의무 이행 여부 등을 판단해 기소 여부가 결정된다. 고용부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에 대해 조사한 사망 사건은 지난 8월 말 기준 134건(사망자 145명), 질병 사건은 2건(29명)인데 54건이 입건됐고,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은 19건에 불과하다. 사업주가 안전 확보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면 처벌을 피할 길이 열려 있다. 비슷한 성분의 세척제 사용으로 다수 노동자가 급성 중독되는 사태가 발생한 두 업체가 지난 2월 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는데 한 업체 대표는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하는 등 의무를 다했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리됐다.

시행 초기인 만큼 법의 안착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해야지 처벌 완화를 추진할 때가 아니다. 정부가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모호한 규정을 구체화해 기업의 수용성을 높이고 예방 활동을 유인할 필요가 있지만 법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시행령 개정을 통해 법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엄정히 집행하고 기업의 산재예방 활동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고용부는 이달 중으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800명대인 연간 산재 사고 사망자 수를 400명까지 낮추는 게 목표라는데 실효성 있는 대책들이 제시되길 기대한다. 기업들도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안전 관련 인력 및 시설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하청 업체에 안전 비용을 떠넘겨 온 경영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안전에 대한 투자 확대, 합당한 비용 지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란 경영 인식이 자리 잡아야 산재 공화국 오명을 벗을 수 있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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