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낡고 불편한 법을 바꾸는 게 민생 정치다

국민일보

[고승욱 칼럼] 낡고 불편한 법을 바꾸는 게 민생 정치다

입력 2022-10-26 04:20

일상 파괴하는 소음 집회 막을
집시법 개정안 국회 계류 중

취지와 내용 여야가 같은데
정쟁에 입법 미루는 게 현실

서로 다른 생각 모두 꺼내놓고
절충하는 국회의 역할 실종돼

지금 국회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무려 23개나 계류돼 있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대표 발의한 의원이 제안설명을 마치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가 나온 법안만 13개다. 발의한 의원의 소속 정당은 달라도 개정안의 취지는 비슷하다. 너무 시끄러운 시위는 곤란하다는 소음 기준 강화, 욕설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는 혐오 표현 규제, 특정 시간과 지역에서 시위를 불허하는 금지 조항 신설이 그것이다. 참을 수 없는 소음을 쏟아내는 도심 시위와 문재인 전 대통령 양산 사저 앞 난폭한 시위대 때문에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23개 법안 중 22개가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이 일상을 파괴하는 시위대의 과도한 확성기 소리로부터 언제쯤 벗어날지는 알 수 없다.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라고, 어서 바꾸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의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시끄러운 주말을 불편한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현실은 아직 그대로다.

상임위에 계류된 23개 집시법 개정안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발의한 의원들의 정치적 입장이 선명하다. 현행 집시법 11조는 100m 이내 옥외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장소로 국회, 법원, 대통령 관저, 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 공관, 외교 기관을 명시하고 있다. 이곳은 대규모로 커지지 않는다는 조건이 충족돼야 집회·시위를 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와 집무실과 관저가 분리되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 조항에 대통령 집무실을 넣은 법안을 발의했다. 시위대에 시달리는 문 전 대통령 소식이 전해지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전직 대통령 사저를 포함시킨 개정안을 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국립묘지, 각종 문화재, 각급 선거관리위원회를 시위 제한 장소로 지정하거나 아파트 앞에서는 입주자 대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법안도 나왔다. 반면 시위 금지 구역을 정한 11조를 전면 폐지하자며 민주주의의 원칙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도 있다.

소속 정당이 다른 의원은 지향하는 이념이 서로 다른 게 당연하다.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집단을 대표해 모였으니 같은 당 안에서도 사안에 따라 이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쏟아져 나온 집시법 개정안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원과 각국 대사관은 물론이고 그 많은 문화재와 어린이집까지 피해야 하니 의원들이 제안한 법안이 모두 시행되면 시위는 산 속에서 해야 할 판이다. 그러니 누구도 제 뜻을 완전히 법에 담지 못한다.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누군가는 새로운 법안을 준비할 것이다. 우리가 국회에 기대하는 정치가 이런 것이다. 이견을 남김없이 꺼내놓은 뒤 절충하는 모습이다. 사상과 의사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에게 절실한 시위대의 소음 규제는 유치원생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절충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끄럽다고 시위를 금지할 게 아니라 소리를 낮추면 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지난해 제안된 개정안이 시위 시간과 장소 제한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 법안은 소음 기준을 강화하고 실효성을 높이는 데 방점을 찍었다. 확성기 볼륨을 한껏 높여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구호를 들려주는 것은 7080 세대의 옛날 방식이다. 여야 모두 SNS 메시지가 꽹과리 소리보다 훨씬 강한 울림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6월 이후 그렇게 하자고 나온 개정안이 무려 5개다. 2개는 국민의힘 의원이, 3개는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함께 이름을 올린 의원이 58명이다. 그런데 국회는 거기서 멈췄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2020년 5월 20일 여야는 집시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헌법재판소가 당시 집시법 11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입법 시한인 2019년 12월 31일을 훌쩍 넘겼지만 아예 처리를 안 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집시법 개정안은 20개가 넘었지만 그날 바뀐 건 헌재가 문제 삼은 그 조항뿐이었다. 여야가 지금처럼 계속 싸우면 21대 국회도 그렇게 끝날 확률이 높다.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조장하는 국회에 불과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낡은 법을 어서 바꾸는 것. 민생 정치는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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