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서유럽의 가난한 나라, 영국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서유럽의 가난한 나라, 영국

입력 2022-10-28 04:20

세계 5위 경제대국이던 英
실질임금 등 국민 생활수준
서유럽 하위권으로 추락

브렉시트 비롯해 영국 정치의
거듭된 오판과 헛발질에
선진국 국민이 가난해졌다

정치가 경제 운명을 가르는데
한국 정치는 과연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지켜줄까


요 몇 달 영국 뉴스가 꽤 많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로 세기의 장례식이 열렸고, 리즈 트러스 총리의 경제정책 헛발질에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그래서 양상추 유통기한과 총리 재임기간 중 어느 쪽이 더 긴지 견주는 코미디를 보여주더니, 사상 첫 인도계 총리가 다우닝 10번가 앞에 섰다. 영국 상황에 관심이 많은 미국 언론은 경쟁하며 뉴스를 쏟아냈는데, 이어지는 보도 속에서 엊그제 어느 잡지가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은 어떻게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됐나’.

얼마 전까지 세계 5위 경제대국이던 나라(최근 인도에 추월당했다)에 ‘가난’이란 수식어를 붙인 기사는 통계를 들이밀었다. 영국의 구매력 기준 실질임금은 2005년만 해도 독일과 프랑스에 앞섰지만, 금융위기를 겪고 난 2010년 아일랜드에도 뒤처졌고, 브렉시트를 택한 뒤에는 서유럽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독일·프랑스의 실질소득이 15년간 40%씩 증가할 때 영국은 고작 9% 상승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전망한 영국의 내년 경제성장률은 0%다. G20(주요 20개국) 국가 중 이보다 낮은 건 전쟁 중인 러시아밖에 없다.

매달 10%씩 물가가 뛰는 통에 올해 구매력 저하는 특히 심각해서 영국인 6명 중 1명이 끼니를 거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런던의 화려함에 가려졌던 선진국의 ‘가난함’을 인플레이션이 들춰내고 있다. 그리된 원인을 잡지는 영국 경제가 걸어온 길에서 찾았다. 영국은 1980년대 불황이던 제조업을 포기하고 금융을 택했다. 산업혁명의 나라가 산업을 버리면서 저생산성이 고질화했다. 현재 산업용 로봇 밀도는 동유럽의 슬로베니아나 슬로바키아보다 낮다. 자동세차기계 보급대수가 15년간 50%나 줄어 “영국에선 사람이 로봇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우스개도 나돈다.

그래도 금융업이 잘돼 2000년대 초반까진 괜찮다가 미국발·남유럽발 금융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가 휘청거리자 영국인은 책임을 밖으로 돌렸다. 유럽연합과 이민자를 탓하면서, 화려했던 그 옛날을 떠올리면서 브렉시트를 강행했다. 바다로 나가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개방과 교역으로 부를 일군 이들이 거꾸로 폐쇄와 단절을 택하니 경제는 더 쪼그라들었다. 산업화와 세계화, 잘해온 경로에서 차례로 벗어난 선진국의 쇠락을 전하며 잡지는 미국의 미래에 주는 교훈을 찾았는데, 내게는 한국의 현재에 주는 시사점이 보였다.

영국은 브렉시트 논의가 본격화한 이후 7년 새 다섯 번째 총리를 앉혔다. 그 혼란은 온전히 만들어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2015년 총선 공약으로 내건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안 해도 됐었다. 잔류파인 그는 52대 48로 잔류가 우세한 여론조사만 믿고 이참에 당내 반대파를 잠재우려 도박을 벌였다. 투표 결과 정반대로 뒤집혀 나라를 혼돈에 몰아넣은 꼴이 됐다. 뒤이은 테레사 메이는 유럽연합과 결별 합의안을 작성했지만, 의회에서 번번이 퇴짜 맞아 반복된 불신임투표 끝에 물러나야 했다.

보리스 존슨은 브렉시트 캠페인 당시 신문에 기고할 탈퇴론 칼럼과 잔류론 칼럼을 모두 써놓고 어느 진영에 설지 끝까지 저울질하다 탈퇴를 택한 인물이다. 그쪽이 총리가 되는 데 유리하다고 본 거였다. 결국 됐는데, 각종 비리 의혹과 스캔들을 일으키다 사임했다. 후임인 리즈 트러스를 영국 언론은 야심가라고 평했다. 제2의 마가렛 대처가 되려는 야심이 너무 커서 소신을 자주 바꿨다. 중도정당에 있다가 보수당으로 갔고, 브렉시트 반대진영에 있다가 브렉시트 이행 내각에 들어갔다. 야심만큼 실력은 갖추지 못해서 경제에 풍파를 일으키고 최단명 총리가 됐다.

캐머런의 어설픈 오판부터 트러스의 무모한 정책까지 지난 7년간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은 것은 정치였다. 금융위기 이후 경제 체질을 바꿔갈 기회를 정치가 내던졌고, 그 혼란을 수습하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찾아온 초인플레에 도리어 기름을 부었다. 정치 리더십의 부재는 이렇게 선진국 국민도 가난해지게 만든다. 지금 한국 정치의 리더십은 영국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선진국 국민이 된 우리를 한국 정치는 가난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까? 여야 모두 민생을 말하지만 상대방을 욕할 때만 쓴다. “민생 외면한 야당 탄압.” “민생 외면한 방탄국회.” 저들은 표심에 경제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 잘 아는데, 경제에 정치가 중요하다는 건 모르고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