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적 재료가 가지는, 있는 그대로의 쓰임새가 바로 작품”

국민일보

“산업적 재료가 가지는, 있는 그대로의 쓰임새가 바로 작품”

서울서 ‘시간의 초상:정현’ 개인전 연 중견 조각가 정현

입력 2022-11-06 20:10 수정 2022-11-07 17:06
정현 작가가 최근 개인전을 하는 서울 성북구 성북구립미술관 전시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뒤로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 때 숯으로 변한 나무를 가지고 만든 신작이 보인다. 이한결 기자

얼굴 조각상으로 가득 찬 3층 전시장.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오려는 데 좌대 위에 높이 1m 정도의 검은색 사각기둥이 세워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끌 등으로 거칠게 후벼 파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속살을 드러내듯 새겨진 나무의 문양은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내장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 추상적인 무늬에서 인간의 고뇌를 상상하게 된다.

중견 조각가 정현(66)이 서울 성북구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개인전 ‘시간의 초상: 정현’을 한다. 전시에는 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가 프랑스 파리 에콜드보자르에 유학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30여년에 걸친 작업세계의 변천사를 조망할 수 있는 조각과 설치 작품, 드로잉 등 100여 점이 나왔다. 작가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났다.

30대 시절에 만든 인체 조각(1989년).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초기에 작가를 사로잡은 것은 알베르트 자코메티를 연상시키는 인체 형상이었다. 거친 표면감으로 실존주의적 고뇌를 형상화하던 그는 어느 날 형태를 재현하는 구상 조각 작업을 버렸다. 파리유학 시절, 교수로부터 “예술이란 철학적 사유와 시적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사실적으로 인체를 재현하는 작품에는 보이기 힘들다”는 조언을 들으며 퍼뜩 정신이 든 것이다.

그는 점토를 정교하게 다듬는 조각 도구 헤라(주걱)를 버리고 대신 도끼와 삽, 칼 등을 들었다. 나무와 흙을 도끼나 삽으로 내리찍고 끌로 후벼 팠다. 생선을 자를 때 쓰는 칼로 점토를 내리치기도 했다. 그리하여 깎이고 문드러지며 추상화된 형상에서는 실존의 고통 속에서도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가 더욱 강렬하게 전달됐다. 살점이 다 뜯겨나간 뒤 뼈만 남은 인체를 서체를 쓰듯 점토로 이어 붙여 형상화하기도 했다.

40대 초반에 도끼를 찍어 나무에 추상적인 형태를 만든 작품(1999).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그런데 작가 정현이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인 2001년부터 선보인 폐침목 작업에서부터다. 버려진 침목 2개를 다리처럼 이어 붙이고 나머지 하나를 몸체처럼 끼워서 인간 형상처럼 세운 것이다. 하지만 흙과 돌, 나무 등 전통적인 조각 재료에 미술교육을 통해 배운 조각적인 행위를 가해 추상화된 인체 형상을 만들던 그가 기성품인 폐침목으로 작업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망설임의 시간을 증거하는 것이 전시장 한 켠 그 사각 기둥 작업이다. 부끄러움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처럼 작업실 구석에 쳐 박혀있던 그 작품들은 폐침목 작업으로 이어지는 ‘관절’ 같은 역할을 하기에 회고전 성격의 이번 전시에 내보이게 됐다고 전시를 기획한 김경민 학예사는 설명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자갈에 찍혀 곰보 자국처럼 우둘투둘해지고 너트나 이음새도 그대로 박힌 침목으로 만든 인간 형상은 그 단순함으로 인해, 또 침목 그 자체가 갖는 물질감과 상징성 때문에 비장미가 있다. 작가는 아스팔트를 그라인더로 자르거나 정으로 깨고 드릴로 파서 만든 형상 그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길가에 뒹구는 잡석 자체를 신석기처럼 깬 뒤에는 작품이라고 내놓기도 했다.

50대 초반에 철근을 사용해 나무처럼 만든 작품(2009).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미술관 밖에 조성된 ‘거리 갤러리’에도 설치 작품이 있다. 맨 먼저 ‘미루나무’가 눈에 확 들어온다. 공사판에서 쓰는 철근을 나뭇가지와 나뭇잎처럼 다닥다닥 이어 붙여 치솟도록 한 나무 형상의 작품이다. 철근은 위로 솟기도 하고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도 하는 등 치열한 쟁투를 벌이는 형국이다.

“2005년부터 난지도 옆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작업장을 마련해 10년을 지냈습니다. 그 시절 매일 뒷산을 올랐는데, 나무들이 햇빛을 벌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 숲에서 인간 사회를 봤습니다. 어느 식물학자가 ‘숲은 사람의 삶보다 치열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거든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끊임없이 상승하고 싶어 하는 산업화 사회 인간들의 욕망을 그렇게 철근 나무 작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는 과거 전봇대로 쓰이던 나무인 목전주 6주를 구해 그대로 세우는 설치 작업을 통해 그런 욕망을 표현했다.

작가는 자신이 조각 재료로 사용한 기성품인 폐침목, 아스팔트, 잡석, 목전주 등을 ‘하찮은 것에 주목한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하찮은 것’이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들은 산업화시대를 이끌던 도로와 철로, 그 길을 내기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던 산업역군의 상징이다. 산업역군은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했다. 정현 작가의 작품들에서 남성을 넘어 가장의 무게, 살아남아 생존하려는 안간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게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50대 후반에 파쇄공을 사용한 설치 작품(2014).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1917년생인 아버지는 9남매를 모두 대학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전기기술자인 아버지는 아침 일찍 공사현장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대화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무뚝뚝했지만 그게 가장으로서의 성실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깨진 잡석, 목전주를 그대로 작품으로 가져온 것에서 보듯 작가는 점점 자신의 작품에 조각적 행위를 가하지 않는다. 산업적 재료가 가지는 있는 그대로의 느낌과 쓰임새 그 자체를 작품이라고 내민다. 제철소에서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작은 크기로 깨부수기 위해 쓰는 파쇄공 그 자체를 작품이라고 내놓은 것이 그 절정이다. 파쇄공은 처음 제작할 때는 15톤에 달하는 사각형 모양이었지만 기중기에 매달려 지상 25m 높이에서 수없이 낙하를 반복하는 사이 무게는 반으로, 모양은 둥글게 변해버린다. 그 커다란 둥근 쇠덩어리야 말로 1960년대 이후 수출주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산업역군의 상징이다. 그 아버지 세대는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그 세대를 기억하고자 한다.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로 탄 나무들에 눈길이 간 것은 그래서 일 테다. 타서 숯이 된 나무에서 사무치는 감동을 느끼고 5t 트럭에 싣고 왔다. 전시장에는 검게 탄 나무 그 자체를 켜켜이 쌓아놓았다. 하지만 그대로가 아니라 고열 처리해 광택을 냈다. 갈라진 틈에는 금속을 박아 멀리서보면 반짝이게 했다. 죽음 이후에도 보석처럼 빛나 그 존재감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12월 4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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