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네덜란드와 일본의 반면교사

국민일보

[돋을새김] 네덜란드와 일본의 반면교사

김찬희 산업부장

입력 2022-11-29 04:02

빛은 다양한 파장을 지니는 전자기파다. 파장의 단위는 나노미터(nm, 10억분의 1m)인데, 눈으로 느끼는 색을 가지는 파장 영역이 가시광선이다. 가시광선에서 가장 파장이 긴 게 빨강, 가장 짧은 게 보라다. 빨강보다 파장이 긴 빛은 적외선, 보라보다 짧은 빛은 자외선이다. 자외선보다 더 짧아 파장 범위가 10nm에 이르는 빛이 극자외선(EUV)이다.

EUV는 반도체 공정 중 하나인 리소그래피(Lithography)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리소그래피는 집적회로 표면에 만들고자 하는 패턴을 빛으로 촬영한 수지를 고정한 뒤 화학 처리하는 기술이다. 햇빛처럼 넓은 빛을 사용하면 각각의 파장에 따라 물질이 전자기파를 흡수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의도대로 패턴을 새길 수 없다. 그래서 파장이 짧은 광원이 필요하다. 파장이 짧은 만큼 ‘회절’은 줄어들어서다.

반도체 칩에 요구하는 집적·정밀도가 높아지면서 ‘더 짧은 빛’을 찾게 됐고, 현재 초미세 공정에는 13.5nm 파장의 EUV를 쓴다. EUV는 공기 중에서, 또는 물질을 지날 때 쉽게 흡수돼 버린다. 그래서 EUV용 광원 기술은 ‘초격차 장벽’ 안에 자리한다. 전 세계적으로 EUV 장비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은 사실상 네덜란드의 ASML이 유일하다. ASML의 제품은 부르는 게 값이다. 주문한다고 바로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공들여 ASML 경영진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ASML은 EUV 노광장비 기술을 20년이나 연구했다.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네덜란드의 첨단기술 산업 생태계 덕분이다. 네덜란드는 곳곳에 ‘대학-연구기관-기업’을 묶은 산학연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정부는 전략적으로 산업 클러스터를 키웠고, 부품·소재 분야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쌓았다. 한국의 첨단산업 소재·부품 공급망에서 22.2%는 ‘메이드 인 네덜란드’일 정도다.

일본 반도체 산업도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1980~90년대에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무른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6개(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쓰, 미쓰비시, 마쓰시타)는 일본 기업이었다.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32.8%(1991년 기준)에 달했다. 강력한 시장 지배력의 뿌리에는 정부의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와 치밀한 전략이 있다. 통상산업성 주도로 1976년 만든 민관협의체 ‘초LSI기술연구조합’이 단적인 사례다. 이 기관은 기업 간 기술 공유, 연구·개발 중복 투자 방지, 반도체 산업 생태계 창출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성과가 찬란한 만큼 추락의 폭도 깊다. 현재 세계 반도체 시장을 지배하는 10대 기업 가운데 일본 기업은 없다. 국가별 점유율은 미국 50%, 한국 25%, 대만 15%에 이른다. 일본은 나머지 10%를 놓고 중국 유럽과 경쟁 중이다. ‘반도체 왕국’ 일본의 쇠락 이유는 여러 가지다. 어느 게 결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혁신·자율을 방해한 ‘지나친 간섭’ ‘경제를 압도한 정치’가 가속 페달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부흥’을 외치며 NEC, 히타치, 미쓰비시의 메모리 사업 부문을 합쳐 1999년 엘피다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실책을 거듭한 엘피다는 2012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그해 7월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팔리면서 사라졌다.

네덜란드와 일본 사례에서 보듯 반도체 산업은 여느 산업보다 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승자 독식, 선점 효과도 강력하다. 제때 필요한 혁신과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면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도 빠르게 도태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반도체특별법(K칩스법)’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김찬희 산업부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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