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골목길은 왜 좁아지는가

국민일보

[청사초롱] 골목길은 왜 좁아지는가

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입력 2022-11-30 04:03

60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서울의 도로망은 복잡하다. 중국 베이징의 거대한 격자형 도로망, 개선문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프랑스 파리의 방사형 도로망에 비하면 무질서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로가 이 모양이니 골목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골목길은 불법 건축물과 불법 주차 차량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서울의 골목길은 언제부터 ‘혼돈의 카오스’가 됐는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한양 천도를 결정한 조선 왕조는 고려 수도 개성의 왕족, 관료, 주민을 이주시키고 신분에 따라 택지를 차등 지급했다. 주택 건축은 전부 허가제였다. 거주 희망지를 보고하면 측량 후 허가를 내주었다. 통행을 방해하거나 풍수를 해치는 곳에는 집을 짓지 못했다. 불법 주택은 인정사정없이 철거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주택이 부족해지자 한양 주민들은 점차 국유지를 잠식하고 도로를 침범했다.

한양의 중심지였던 종로와 남대문 인근 거리는 일찌감치 가설 점포와 불법 가옥으로 가득 찼다. 현재의 광화문 앞에 있던 육조거리는 주요 관청이 밀집한 곳이다. 관청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관청 좌우의 민가는 슬금슬금 도로를 침범해 영역을 넓히니, 관청으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양 주민의 주택과 경작지는 국왕의 행차길 ‘어로’까지 침범했다. 어로를 침범해 농사짓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법조문이 있으나 유명무실했다. 어로는 폭이 5m 이상이어야 한다. 어가 좌우로 호위하는 군사가 탄 말이 나란히 가야 해서다. 그런데 한양의 대로는 이 정도 폭조차 나오지 않는 곳이 많았다.

1661년 현종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러 대궐을 나갔다. 도로가 좁아 어가의 좌우에 군사를 배치할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한쪽만 배치하고 행차했다. 어가의 휴게소 ‘주정소’ 역시 경작지로 변했다. 1746년 정릉에 행차하다가 서빙고 주정소에 멈춘 영조는 진노했다. “군주가 천막을 치는 곳에 백성이 어찌 감히 침범하여 농사짓는가. 마음은 백성을 사랑하나 그 버릇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의 죄가 아니라 단속하고 금지하지 못한 관원의 죄이다.”

국왕이 불호령을 내려도 그때뿐이었다. 누가 언제부터 침범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책임을 묻기도 모호했다. 반발이 두렵고 원망을 듣기 싫어 단속에도 소극적이었다. 사대부 집은 손도 대지 못하고 민가 몇 채를 철거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단속이 잠잠해지면 다시 슬그머니 도로를 침범하니 소용없는 짓이었다. 1896년 공포한 내부령 제9호는 도로에 관한 규칙이다. “황토현(현 세종대로 사거리)부터 동대문까지, 광통교에서 남대문까지는 일국의 대로이니 가옥이 길을 침범하고 개천을 넘어서는 일은 법에 따라 금지한다.” 20세기가 목전에 닥칠 때까지 도로 침범은 끊이지 않은 모양이다.

맹자는 정치란 땅의 경계를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토지와 도로의 경계를 확정해 분쟁을 막는 것이 정치가 우선할 일이라는 말이다. 입만 열면 왕도정치를 말하는 자들이 경계를 바로잡는 일은 귀찮다며 도외시했으니 아이러니다. 중국과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곳의 엄격한 도로법을 칭찬했다. 조선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나라들은 왕도정치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었다.

도로 침범은 이태원 참사 원인 중 하나다. 불법 건축물로 도로 폭이 좁아지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득과 편리를 위해 다수의 시민이 피해를 보는 현실은 참사 이후로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도 시민들은 불법 건축물과 불법 주차 차량이 점령한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뿌리 깊은 부조리를 방치한 채 국민의 안전을 말해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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