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세습을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국민일보

[이동훈 칼럼] 세습을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입력 2022-11-30 04:20

코로나19 위기로 일보다 돈 버는 게 최고 분위기
재벌 세습 만연한 한국이 북한 백두혈통 세습 비난
정부까지 상속세 완화 앞장 희미해지는 공정과 상식

요즘 드라마 ‘슈룹’과 ‘재벌집 막내아들’이 화제다. 슈룹은 자식의 세자 책봉을 위해 중전과 후궁들이 벌이는 조선 궁궐 암투극이고, 재벌집 막내아들은 총수직을 놓고 음모가 펼쳐지는 기업 드라마다. 지난 27일 밤 방영분이 각각 14.1%와 14.9%로 시청률 최고치를 찍었다. 케이블TV 드라마 두 개의 시청률이 지상파 3사의 월드컵 중계 열기를 뚫고 10%를 훨씬 웃도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원초적 본능, 즉 최고 권력과 부에 대한 동경심이 작용했을 듯싶다. 드라마에서 음모와 협잡, 정경유착, 권모술수 같은 허물쯤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될 정도로 권력 암투 장면이 돋보인다.

요즘 현실 세계에서도 드라마 못잖은 광경들이 벌어진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둘째 딸 주애양을 지난 18일과 27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장과 기념 촬영 현장에 데리고 나왔다. 10세 전후의 소녀에 ‘존귀하신 자제분’이라 예우하며 보도한 관영매체는 군 지휘관이 굽신대는 모습까지 내보낸다. 이에 국내 호사가들은 ‘4대 세습의 신호탄’, ‘백두혈통 세습의 허구’ 등 거침없는 분석을 내놓는다.

백두혈통을 비웃지만, 남측도 오십보백보다. 재벌 3세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레스토랑에서 아들과 얼싸안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김정은 부녀 사진과 대비되는 효과를 연출하기도 했다. 입에 ‘멸공’을 달고 사는 정 부회장이야 애교로 넘긴다 해도 지난 17일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국내 8인의 재벌 오너들과 가진 롯데호텔 차담회 풍경은 압권이었다. 호텔 방 벽에 국왕 사진을 걸어 놓은 채 상석에 앉은 그는 형제 상속 전통을 이어온 사우디에서 최초로 부자 상속이 예정된 인물인데 그와 마주한 재벌 오너들은 모두 2대째 세습을 잇는 3세라는 점이 흥미롭다. 호사가들이 사우디 관영매체가 촬영한 어전회의 같은 이 장면을 김정은 부녀 사진과 함께 봤다면 쉽사리 북한 백두혈통의 세습 운운했을지 궁금하다.

그동안 3세들이 기업 총수 자리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여러 허물에 대한 세간의 비난은 창업주 할아버지들이 이뤘던 중동 특수를 재현할 대역사 앞에 무장해제된다. 수출 경쟁력 감소와 무역적자 급증 속에 우리 국민의 미래 먹을거리를 책임진 3세 ‘경제 국가대표’들에게 편법 상속은 곁가지요 과거지사일 뿐이다. 1조 달러(1326조원)대 네옴시티 건설 프로젝트를 들고 방한한 빈 살만도 마찬가지다. 총리의 공항 영접을 받고 외부 손님으론 처음으로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초대되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그에겐 워싱턴포스트 기자 카슈크지 살해 의혹 등 인권 유린에 대한 면죄부쯤으로 인식됐을 법도 하다.

몇 해 전만 해도 4~5%의 지분을 가진 재벌 일가가 황제 경영을 일삼고 부의 편법 세습도 모자라 공개된 기업의 경영권까지 승계하는 건 국가 경제를 좀먹는 행위로 지탄받았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정점을 찍은 정경유착도 더이상 발을 붙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드라마 슈룹 등의 인기에서 볼 수 있듯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엔 세습과 이를 위한 편법 상속·증여가 부러움의 대상으로 변한 듯한 인상이다. 코로나 위기로 소상공인이 몰락하는 걸 보면서 일보다 쉽게 돈 버는 게 최고라는 풍조가 생긴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동산과 코인 영끌 투자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에게 착실하게 한 계단씩 올라가는 계층 이동 사다리는 무용지물이 됐다.

게다가 조국 사태를 계기로 출범한 윤석열정부의 공정과 상식 구호는 희미해졌다. 오히려 정부가 나서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세습을 권장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연출된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상속·증여세를 완화하는 세제개편안 논의가 야당 반발에 부닥치자 여론전에 나선 게 대표적 사례다. 기재부가 언론에 배포한 ‘상속·증여 세제 개편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자료는 과도한 상속·증여세가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다는 내용이다. 2, 3세가 물려받는 주식 등이 오너 일가 재산일 뿐 회사의 자금은 아닐진대 투자·일자리와 직접 연관이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분 상속을 경영권 상속과 동일시하는 것도 황제경영의 폐습이다. 기업 상속에 대한 불신을 줄이려면 독단 경영, 일감 몰아주기, 갑질 경영 등 기업들이 자초한 구태를 해소하는 노력이 먼저다. 윤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인 민간주도 성장을 재벌을 위한 성장으로 오해하는 건 아닌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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