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가 된 논바닥 그림… ‘민중미술’ 대가의 또 다른 시도

국민일보

벽화가 된 논바닥 그림… ‘민중미술’ 대가의 또 다른 시도

임옥상 개인전… 여기, 일어서는 땅

입력 2022-12-04 21:15
임옥상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개인전 ‘여기, 일어서는 땅’에 나온 메인 설치 작품. 경기도 파주 장단평야 논에 그린 그림을 논바닥 째 떠서 미술관 벽에 붙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니 나오는 천장 높은 전시실. 층고가 무려 아파트 4층에 맞먹는 12m라 공간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있는데, 그 전시실 한쪽 벽면을 거대한 흙벽처럼 채운 ‘벽화’가 있다. 이 벽화 설치 작품은 놀랍게도 경기도 파주 장단평야 논에 대지미술처럼 그린 그림을 논바닥 채 그대로 떠서 미술관의 벽에 붙인 것이다.

대표적인 민중미술 원로 작가 임옥상(72)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임옥상: 여기, 일어서는 땅’을 한다. 생존 작가 최고의 영광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한 민중미술 진영 작가는 ‘광부 화가’ 황재형(2021)에 이어 임옥상이 두 번째다.

미술관 측은 “미술 재료용으로 가공되어 정제된 흙이 아닌 진짜 흙, 생존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서 땅 흙을 마주하는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흙벽에는 농부와 농기구, 잡목 등 작가가 가한 회화적 행위 뿐 아니라 농부와 노루, 새의 발자국, 농기계가 지나간 자욱 등 야생의 흔적이 있다.

이 작품은 임옥상이 ‘땅(흙)의 작가’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서울대 회화과를 나온 그는 민중미술의 진원지인 1980년의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 참여하며 땅에 주목했다.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이전까지 해오던 추상미술에 등을 돌리고 대중과 소통하기 쉬운 구상미술을 선택한 그는 농촌 현실을 다룬 ‘땅’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들판에 번지는 ‘들불’, 개발에 멍드는 시뻘건 ‘땅’, 농민의 피가 고여 있는 듯한 ‘웅덩이’ 등 미술활동을 하던 초기에 그가 그리던 작품에는 늘 흙이 있었다. 농촌 풍경을 목가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수탈당하고 개발에 멍드는 땅의 반란을 선동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이었다. ‘시뻘건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낙인 찍혀 ‘땅Ⅱ’ ‘땅Ⅳ’ ‘얼룩’ 등 몇 점이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82년 당국에 압수되기도 했다.

그런 그였으니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의 주제가 흙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특히 이 논바닥 벽화 설치 작품 ‘여기, 일어서는 땅’은 이번 개인전 제목으로 차용될 정도로 간판 작업으로, 크기에서 관중을 압도하며 “정력적 에너지와 남성적 힘이 놀랍다”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미술평론가 심광현씨는 이번 개인전을 “작가가 생태적 전환을 모색한 전시”라고 평가한다. 흙을 매체로 썼고 야생의 흔적까지 담았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중미술 초기의 대표작인 '보리밭'(1983, 캔버스에 유채, 94×140㎝).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과거 임옥상이 그린 땅은 은유의 언어였다. 보리밭에 반신상으로 서 있는 농부는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비장하고 섬뜩하다. 땅을 그린 게 아니라 땅의 저항, 즉 ‘일어서는 땅, 분노하는 땅’을 그린 것이다. 거친 구호가 없어도 보리밭의 노랑과 산의 초록이 주는 생생한 색 대비, 기골이 장대한 반신상의 자세만으로 분노의 감정이 오롯이 전달됐다.

그런데 40여년의 세월을 건너 이번 전시에 나온 이 벽화 작품 ‘여기, 일어서는 땅’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땅을 일으켜 세웠다. 은유의 언어를 회화로 직역한 것이다. 조형적 언어로 치면 후퇴로 비친다. 또 크기가 주는 스펙터클함을 제외하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논바닥을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직각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 전 세계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에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려는 여성적 태도가 요구된다. 남성적인 에너지, 지배적 태도가 간취되는 이 작품은 그래서 불편하게 다가온다.

근년 작인 '흙 A23'(2018, 캔버스에 흙, 먹, 227×14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임옥상은 2000년대 이후 공공미술 작가로 활발히 활동해왔다. 외환위기 직후 서울 인사동에서 거리 퍼포먼스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반인이 참여하는 미술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공공미술과 설치작업을 주로 하던 그가 회화로 돌아온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그는 다시 흙에 주목했다. 작가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과거에는 물감을 칠해 흙의 이미지를 표현했다면 이제는 흙 자체를 지지체로 쓴다. 즉 캔버스 위에 흙을 덧발라 채우고 그 위에 유화물감, 먹물 등을 혼합해서 그림을 그린다. 2017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 ‘바람 일다’는 그런 작품 세계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형상화한 대형 가면에 ‘그 입 좀 다물라’는 듯 반창고가 붙여진 작품을 내놓는 등 현실 정치를 풍자하는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한편 ‘흙 회화’ 연작도 공개했던 것이다

임옥상이 그리는 ‘흙 회화’는 구상도 있고 추상도 있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의 매화도를 연상시키는 매화 그림에서부터 신라의 얼굴 무늬 수막새를 연상시키는 초상화, 백두산과 한라산의 산세를 서예적 서체로 그린 산수화, 일획의 붓질을 연상시키는 서체적인 추상화 등 다양하다. 분출하는 실험처럼 뚜렷한 결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상이 짙다. 구상이냐 추상이냐는 세계관의 차이인데 그것들이 혼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미술은 엘리트 미술인 관념적 추상화에 반기를 들고 구상을 미술형식으로 택하자고 선언한 ‘현실과 발언’ 동인에 뿌리를 둔다.

이번 전시의 키워드는 흙이다. 제1회 개인전에 나온 ‘웅덩이’(1978)에서부터 전주 한지를 사용한 부조 회화 시기의 ‘새’(1983), 신작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2022)까지 나왔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회화로만 구성 된 제7 전시실은 작품들이 어떤 선형적인 흐름을 갖지 못한 채 맥락 없이 섞여 있다. 그러다보니 작품 세계의 변천과정이 전달이 잘 안 된다.

10여년간 정력적으로 공공미술 작가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한 조명도 취약했다. 그러다보니 초기작 회화 ‘웅덩이’가 설치 작품 ‘검은 웅덩이’로 번안되거나 인간 머리 형상의 설치 작품 ‘흙의 소리’ 등이 전시장에 놓이는 등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작가가 추구하는 ‘지금, 여기’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년 3월 12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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