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국민일보

[한승주 칼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입력 2022-12-14 04:20

월드컵으로 국민에 각인된 말
실패해도 도전하겠다는 정신
모처럼 희망적인 올해의 문장

원조는 '롤' 프로게이머 데프트
"져도 무너지지 않는 게 중요"
데뷔 10년, 일곱 번 도전 끝 우승

2002 꿈은 이뤄진다 결과 중심
2022 중꺾마는 기분 좋은 변화
과정이 좋았다면 져도 괜찮다

나에게 올해의 문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이걸 선택하겠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 대한민국의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이 확정된 후 선수들이 펼쳐 든 대형 태극기에 적힌 문장이다.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이기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마스크 투혼을 보여준 손흥민, 포르투갈전 역전 결승골을 넣은 황희찬, 한국 선수로는 첫 월드컵 멀티골을 기록한 조규성 선수 모두 ‘중꺾마’ 정신이 축구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월드컵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된 말이지만 사실 원조가 따로 있다. e스포츠 ‘리그오브레전드’(LoL·롤) 프로게이머 데프트(26·김혁규)가 주인공이다. 프로선수 데뷔 10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언더도그(약자)’로 지냈다. 어느새 게임업계에서는 노장이라 불리는 나이가 됐다. 롤은 5명이 팀을 이뤄 싸우는 전투 게임이다. 전 세계 MZ세대가 여기에 열광한다. 일 년에 두 번 세계 대항전이 열리는데 연말에 치르는 경기가 ‘월즈’다. 축구의 월드컵과 비슷하다고 해서 ‘롤드컵’으로 불린다. 전 세계 시청자 수는 약 2억7600만명으로 미국 미식축구리그나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보다 많다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2023년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데프트가 이끄는 팀 DRX가 지난 10월 롤드컵에 가까스로 진출했을 때 우승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롤에는 영원한 우승 후보로 불리는 페이커(26·이상혁)가 있다. 힘들게 예선을 통과한 후 유럽의 강팀을 만난 첫 본선 조별리그, 데프트는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패배하고 만다. 그때 그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앞으로 팀플레이만 잘한다면 충분히 상대를 꺾을 수 있어요. 패배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끼리만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이 말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영상 제목으로 쿠키뉴스 게임 유튜브에 나갔다.

그의 말대로 최약체로 평가되던 팀은 결승에 올랐고, ‘최강자’ 페이커를 만났다. 이겼다. 일곱 번 도전 끝의 첫 우승이었다. 데프트는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실력으로 증명하리라 다짐했다. 당신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최고의 선수들만 모여 있다고 우승하는 건 아니다. 결국 5명이 다 자기 역할을 해줘야 이길 수 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데프트는 이렇게 MZ세대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 “지더라도 잘 지는 게 중요하다. 지면서 더 배운다. 즐기자. 실패에 필요 이상으로 분해하면 나에게 손해다. 최대한 추스르자”는 말도 했다.

다시 월드컵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말이 좋은 건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꿈은 이루어진다”가 있었다. 좋은 말이지만 꿈은 이뤄져야 한다는 결과 지상주의를 은연중에 담고 있다. 하지만 20년 사이 한국 사회는 달라졌다. 그 변화는 MZ세대가 이끌고 있다. 지난해 도쿄올림픽에서 높이뛰기 우상혁, 수영 황선우 선수 등이 보여준 ‘1등이 아니어도 괜찮아, 나는 올림픽을 즐긴다’는 태도가 보기 좋았던 것처럼 말이다.

선수들뿐 아니었다. 눈비 오는 궂은 날씨에 거리응원을 나선 이들도 월드컵을 오롯이 즐겼다. 예전에는 우리 팀이 지면 무조건 화를 냈는데, 지금은 지더라도 과정에서 충분히 노력했던 부분이 보이는지에 주목했다. 과정이 좋았다면 져도 괜찮다는, 기분 좋은 변화이다.

조규성이 가나전에서 터트린 두 골을 생각해 본다. 당시 3대 2로 졌지만 두 골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같은 조 우루과이와 승점과 골득실은 같았지만 다득점에서 앞서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규성의 골이 결과적으로 16강을 견인한 것이다. 그러니 노력했고 잘 했는데 성과가 없다고, 지금 당장 실패했다고 좌절하지는 말자. 죄송하다는 말도 금지다. 언젠가는 지금의 노력이 큰 결실로 돌아올 테니까.

해마다 대학교수들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꼽는다. 대개 어려운 한자어이고 때때로 현학적이라 쉽게 와닿지 않는다. 내용도 정치가 문제이고, 경제가 위기라는 식의 부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은 모처럼 희망적이다. 물가는 오르고, 취업은 힘들고,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다. 그래도 저물어가는 2022년, 이 문장 하나 부여잡고 새해를 기다려본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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