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뒷장에 0.2㎜ 샤프로 그림… 그의 로봇엔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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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뒷장에 0.2㎜ 샤프로 그림… 그의 로봇엔 ‘이름’이 있다

1회 국민일보 ‘아르브뤼미술상’ 대상 수상한 김경두 작가

입력 2022-12-25 21:50
국민일보 주최 제1회 아르브뤼미술상 대상 수상자인 김경두씨가 최근 국민일보 본사에 인터뷰를 갖고 수상작 ‘블러츠플리플릿츠에이츠’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 로봇은 인공위성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어 상상력을 발휘해 그렸다. 이한형 기자

태극 마크가 달린 거대한 로봇은 완벽한 좌우 대칭의 기하하적 구조 덕분에 늠름하기 그지없다. 0.2㎜ 샤프로 그린 흑백이라 어릴 적 봤던 만화 로봇처럼 정답다.

국민일보가 주최한 제1회 아르브뤼미술상 대상 수상자인 김경두(33) 작가의 작품은 이처럼 추억 속 필기구가 된 샤프로 자신만의 로봇 세계를 구축한다. 이 상은 실험미술의 거장 이건용 화백과 함께 발달장애인 청년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만든 공모전이다. 오로지 손으로만 그렸는데도 자를 쓴 것처럼 반듯반듯한 초정밀함 때문에 발달장애 특유의 집중력이 연상이 된다.

충남 보령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올라온 작가를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인터뷰했다. 육아휴직 중인 두 살 터울 누나가 동행했다. 농협 등에서 받은 숫자만 크게 나온 대형 달력의 뒷장을 사용했기에 뒷면의 숫자가 비친다. 대상을 타자 부모님은 “낙서라고 생각한 그림이 이런 큰 상을 받다니”라며 감격해했고, 본인도 “‘어, 내가, 내가?’ 라며 얼떨떨해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김 작가는 발달장애인이지만 일반 초·중·고를 나왔다. 대학에선 인테리어광고디자인과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도 했다. 그래서 공익요원으로 소방서에서 복무했다. 그게 이번 대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2012년 봄, 그러니 23세 때의 어느 날이었다. 소방서에서 근무하다 인근 주택 지붕에 있는 TV 안테나에 눈이 갔다. 문득 안테나의 형태가 어떤 가상의 캐릭터의 골격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살을 붙이듯 선을 이어가 로봇 형태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케치북 등에 하다가 마땅한 종이를 찾다 농협, 약국 등에서 연말이면 선물로 주는 대형 달력에 눈을 돌리게 됐다. 얇고 광택이 있는 종이 질감이 샤프의 연필 질감과 어울렸다. 처음 0.3㎜였던 샤프는 0.2㎜로 가늘어졌다. 덕분에 더 정밀하게 그릴 수 있게 됐다.

공책에 공주 등 캐릭터를 그리던 누나를 따라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로봇이라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그리는 로봇은 대상 수상작처럼 로봇 한 개가 화면을 꽉채운 것도 있지만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작은 로봇이 사열하듯이 배열된 작품도 있다. 달력 한 장에 2000개가 넘는 로봇이 빼곡하게 들어있기도 하다. 작가는 이 로봇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고 계급도 부여한다. 그는 “이 작은 로봇이 레벨 1이라면 대상 받은 이 로봇은 레벨이 20”이라고 말했다. 대형 로봇은 강인해지고 싶은 마음을, 소형 로봇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자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려내는 능력은 묘기처럼 비쳐져 2018년 SBS TV 프로그램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경두씨가 샤프를 사용해 로봇을 그리는 모습. 손가락에 땀이 배 미끄러지는 걸 막기 위해 샤프에 부상 방지 테이프를 감았다. 이한형 기자

그가 그린 로봇은 묘기 이상의 예술성이 있다. 발달장애인 특유의 집착과 집중력이 만들어낸 고도의 테크닉을 넘어선 미학적 감각이 있다. 정확히 좌우대칭을 이루는 신체 구조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창의력이 발현되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작품이 실물 로봇을 보고 그린 것이거나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로봇을 ‘사진 스캔’하듯이 기억해 그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영화에서 본 로봇의 인상이 영감을 주긴 하지만 그걸 참고하는 비율은 1% 뿐이고 나머지는 상상력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창의성을 알아본 학예사의 눈에 띄어 지난해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기획한 정신장애 및 발달장애 예술인 전시인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작품을 시작한 지 어느 새 10년이 됐다. 그 사이 초기, 중기, 현재에 이르끼까지 3단계의 변화를 거치고 있다. 초기에는 키 1∼2㎝ 작은 로봇을 그렸다. 2014년부터는 공룡, 시계, 피아노, 사람 얼굴 등 친숙한 이미지를 몸통으로 해서 팔 다리가 뻗어가는 로봇을 그렸다. 국민일보 대상 수상작은 인공위성의 이미지를 접목했다. 한국 로봇 캐릭터를 떠올려 그린 것인데, 우주로 도약하고자 하는 웅비의 정신이 느껴지는 로봇에는 태극 마크가 선명하다. 몸체를 떠받치는 다리 옆에는 로켓 추진체를 연상시키는 신체 구조물이 있어 수직상승하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코로나 직전 시기부터는 신들의 세계를 상상해서 로봇화시킨 연작을 제작 중에 있다.

심사위원인 백기영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은 “그의 일상적 그리기 행위는 특유의 미래적 상상력과 이를 계열화하고 조형화하는 분석력을 기반으로 한다”고 호평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힐링이 되기도 하지만 두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서 집중해야해 힘들기도 하다. 그는 “컨디션이 나쁘면 시적인 중지 모드에 들어가거나 며칠 푹 쉬기도 한다”고 했다.

낮에 푹 자두고 자정 무렵 깨서 지내다가 새벽 서너시 에너지가 최고조일 때 작업에 들어간다. 이처럼 ‘새벽형 인간’이 된 것은 소음에 민감해서다. 음의 진폭 차이 때문에 공사장, 자동차 등 외부 소음은 신경쓰이지 않는데, 청소기나 세탁기 돌리는 소리 등 가정 내 소음은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어머니와 감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그의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작업을 할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혼자서 차려먹는다. 해수욕장을 혼자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늘 사람에게 닿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그 마음을 꾹꾹 담아 로봇을 하나씩, 하나씩 번호를 붙여가며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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