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300일간의 젤렌스키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300일간의 젤렌스키

입력 2022-12-23 04:20

러시아가 사흘 만에 끝낸다던
우크라이나 침공 벌써 300일
세계 각국 지원 이끌어내며
항전 주도한 '젤렌스키 효과'

코미디 배우 출신 대통령은
전쟁터란 현실의 무대에서
꺾이지 않는 마음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어 왔다

의지를 가진 지도자 한 명이
해낼 수 있는 일,
생각보다 훨씬 큰 듯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미사일이 날아든 건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2월 24일, 폭발음에 잠을 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아내와 함께 자녀들 방으로 갔다. 열일곱 살 딸과 아홉 살 아들을 깨워 지하벙커로 내려 보내는 동안에도 굉음이 이어졌다. 날이 밝자 루슬란 스테판추크 국회의장이 대통령궁으로 달려왔다. 대통령의 뜻을 확인하고 의회로 가서 계엄령 절차를 진행한 그는 당시 젤렌스키의 표정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의아함을 읽었다고 했다. 곧이어 러시아 공수부대가 키이우에 낙하했다. 그들의 타깃이 젤렌스키라는 군의 보고가 젤렌스키에게 올라왔다. 경호팀이 대통령궁에 있던 모든 이에게 방탄복과 소총을 지급했다. 대다수가 다루는 법을 몰랐고, 젤렌스키도 그중 하나였다.

키이우 외곽에 대통령 전시벙커가 있었다. 공습에 견디도록 요새화된 그곳에 가자는 경호팀 제안을 그는 거부했다. 정부와 군의 너무 많은 간부가 자리를 이탈한 상태였다. 스테판추크는 의원들에게 “키이우를 떠나는 건 배신”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젤렌스키는 그러지 않았다. 자리를 벗어난 이들에게 가족을 대피시킬 시간을 주면서 다시 돌아와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25일 밤 각료들을 이끌고 대통령궁 밖으로 나갔다. 시가전 총성이 울리는 거리에서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다”며 자신의 구형 아이폰으로 40초짜리 영상을 찍었다. 이는 미국의 망명정부 제안을 거절하면서 “내게 필요한 건 차편이 아니라 탄약”이라 했던 말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세계에 알렸고, 이탈했던 간부들은 대부분 돌아와 자리를 지켰다.

젤렌스키는 전투를 지휘하지 않았다. 지도를 펴놓고 이 부대는 저기로, 저 부대는 여기로 말을 놓는 일은 장군들에게 맡겼다. 코미디 극단의 배우였던 사람이다. 부패에 맞서는 대통령역을 하다 정말 대통령이 돼버린 그는 자신이 잘하는 일, 관객과의 소통을 택했다. 이 전쟁의 객석에는 미국과 유럽 정상들이, 동아시아의 한국과 일본까지 많은 세계인이 앉아 있었다. 압도적 열세인 전력으로 나라를 지키려면 세계를 등에 업어야 했다. 개전 후 석 달간 젤렌스키는 거의 매일 외국 청중을 향해 화상 연설과 인터뷰를 했다. 유엔과 나토 회의장에, 한국 등 각국 의회에, 그래미상 시상식장에 올리브색 티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이 등장했다.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돕게 하려면 우크라이나인들이 싸우고 있어야 했다. 그는 매일 전황을 알리고 항전을 독려하는 대국민 연설을 녹화해 공개했다. 그 문장을 매일 써내는 연설비서관이 누구냐고 기자들이 물었을 때 그의 대변인은 “젤렌스키”라고 답했다. 관객의 집중도가 떨어질 때, 주의를 환기할 애드립이 필요할 때, 무대의 배우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런 직감이 찾아오면 열차에 올랐다. 남부 헤르손으로, 동부 바흐무트로, 경호팀 만류를 무릅쓰고 최전선을 찾아 우크라이나가 아직 싸우고 있음을 국민과 세계에 알렸다.

사흘 만에 끝낸다던 전쟁은 그렇게 300일이 됐다. 겨울에 시작했는데 다시 겨울이 왔다. 무차별 공습에 빛과 열과 물이 없는 겨울을 보내게 된 지금, 그가 이번엔 비행기를 탔다. 푸틴 보란 듯이 워싱턴에 날아가 미국 의사당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펼쳐지게 했다. 엄중한 기자회견장에서 농담을 던지는 통에 폭소가 터졌으니 코미디언 기질은 감추지 못했지만, 어설퍼 보였던 배우 출신 대통령은 어느새 노회한 푸틴을 능가하는 전쟁 지도자가 돼 있었다. 패트리엇 미사일 등 더 많은 지원과 지지 여론을 끌어냈다. 혹독한 겨울전쟁에 우크라이나인의 항전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지탱해줄 소식을 갖고 귀국길에 올랐다.

어쩌면 그는 지난 300일간 전쟁터라는 냉혹한 현실의 무대에서 세계를 관객 삼아 거대한 공연을 벌여온 것일지 모른다. 관객의 지지를 얻어내느냐에 나라의 운명이 걸린 그 역할을 생명을 걸고 소화해 왔다. 고비마다 했던 일은 꺾이지 않는 마음을 불어넣는 거였는데, 전격적인 깜짝 방미의 목적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장기전에 지쳐가는 미국 유럽의 우방과 절박한 상황에 처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아직 꺾일 수 없다고 웅변하는, 필사적인 퍼포먼스로 보였다. 시작 당시 뻔해 보였던 전쟁 양상은 지금 180도 달라져 있다.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듯하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