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우리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는가

국민일보

[여의춘추] 우리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는가

고세욱 논설위원

입력 2022-12-30 04:08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글로벌 경제에 대해 “거의 모든 나라가 누구하고든 ‘헤어질 결심’을 했다. 과거엔 없던 변화”라고 평가했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복합위기가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을 영화 제목에 빗댔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2022년 코로나19 대유행 3년차에 접어들 때 엿보인 희망은 2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거품이 됐다. 경제 제재, 서구 vs 러시아·중국의 대립 구도가 글로벌 공급망에 직격탄이 되며 세계화가 사실상 무너졌다.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경기침체의 태풍이 전 세계에 몰아쳤다. 지난해 한국은행 경제전망에서 2.0%로 예상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1%(전망치)로 두 배를 훌쩍 웃돈다. 경상수지는 810억 달러에서 250억 달러로, 설비투자 증가율은 2.4%에서 -2.0%로 곤두박질쳤다. 기준금리는 지난해 11월 1.0%에서 1년 뒤 3.25%로 뛰었다. 블랙스완(예상 못한 위기)은 소득과 부채, 소비, 생산 등 전방위 실물 분야에 타격을 줬다.

출구 마련이 쉽지 않다. 최 회장은 시장 다원화 등 맞춤형 대응을 주문했지만 새롭지가 않다. 답은 과거 패러다임과의 헤어질 결심 아닐까. 우선 동맹(미국), 시장(중국)에 의지해 무난한 성과를 거두던 경제 전략의 수정이 시급하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한 미국, 수출 최대 시장 중국 사이에서 버틸 수 있는 힘. 결국 우리의 몸값(가치)을 높이는 게 중요해졌다. 그들보다 우위여서 러브콜을 받는 분야를 집중 공략하는 게 급선무다. 자연스레 반도체가 첫손에 꼽힌다. 반도체는 더이상 ‘산업의 쌀’에 머물지 않는다. 국가 흥망을 가르는 경제와 안보의 생명줄이다. 지난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삼성 반도체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미국이 대만을 보호하려는 이유도 지정학적 고려보다 파운드리 세계 1위 기업 TSMC 때문이란 게 정설이다.

그러면 우리는 헤어질 결심을 위해 반도체 총력 지원의 자세가 돼 있는가. 최근 통과한 반도체특별법에서 설비투자 세액 공제율은 8%로, 전보다 고작 2% 포인트 올랐다. 이게 정부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반도체에 우리 생사가 걸려 있다” 했는데 정작 여당의 20%는 물론이고 야당(10%)보다도 낮다. 툭하면 기업 살리기에 야당이 발목 잡고 있다고 탓하던 정부의 표리부동이다. 세액공제 글로벌 스탠더드가 25%다. 전쟁터에서 아군에게 총알 8발 주고 25발 있는 적과 싸우라는 격이다. 메모리반도체 외엔 상대와 맞설 만한 사수도 찾기 어렵다. 세계는 세금 감면뿐 아니라 막대한 보조금도 지급하고 있다. 미국이 69조원, 중국 187조원, 일본 19조원에 달한다. 국회에서 통과된 내년도 반도체 지원 예산은 1000억원이다. 정부는 비판이 거세자 대만보다는 공제율이 높다 변명하는데 반도체 기업에 대한 토지 무상 임대, 각종 지원금은 쏙 뺐다. 세수 부족 우려 때문에 찔끔 인상해놓고 이를 “우리 지원 수준도 낮지 않다”고 돌려 말한다. 오죽하면 국민의힘 반도체특위를 이끌었던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차라리 법안을 부결시켜 달라”고 분노했을까.

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순양그룹은 미국, 일본의 반도체 덤핑 공세에 위기를 맞는다. 사업을 접자는 주위의 말에 고민하던 진양철 회장은 막내 손주 도준에게 문제를 낸다. “새우가 어부지리로 고래를 이길 방도는 없겠나.” 도준의 답은 이렇다. “새우 몸집을 키우는 거죠.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지 않을 만큼. 포기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새우편 아닐까요.” 진 회장은 국내 다른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고 미·일 업체와 맞장을 뜬다.

드라마 속 35년 전 상황은 지금과 다르면서 비슷하다. 미·일의 공세가 미·중의 공급망 쟁탈전으로 바뀌었다. 원천기술의 미국, 반도체 수출액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은 우리에겐 고래다. 몸집 불리기 방법이 과거엔 인수합병이었다면 지금은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키를 쥐기 위한 기술 선점과 투자 싸움이다. 관료나 정치인에게 미래를 아는 진도준의 식견을 본받으라 하긴 무리겠다. 하지만 진 회장의 판단력과 결단력은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 아닐까. 포기하기엔 이르지만 답답해서 정부에 묻는다. 2023년을 맞아 우리는 ‘헤어질 결심’을 하는가, ‘뒤처질 결심’을 하는가.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