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서사 넘어 현대적 감성의 조각·판화·사진까지

국민일보

여성주의 서사 넘어 현대적 감성의 조각·판화·사진까지

키키 스미스, 아시아 첫 개인전

입력 2023-01-15 21:19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 키키 스미스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꿈’(1992, 종이에 에칭).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한국은 바닥에 종이를 깔고 아래서 올라오는 열로 난방을 하는 문화가 있다. 여기서 종이는 조각적 요소다. 그것에 영향을 받아 조각을 할 때 겹치고 덮는 작업을 했다.”

독일 출생의 미국 작가 키키 스미스(79)는 1980~90년대 여성성과 신체를 다룬 구상 조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가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을 하고 있다. 작가는 지난 달 중순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줌을 통해 화상 인사를 하며 한국과의 인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구겨진 종이, 접힌 종이 등 다양한 종이 작업을 만나 볼 수 있다.

‘자유낙하’(1994, 종이에 포토그라비어, 에칭, 사포질).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자유낙하’라는 타이틀로 소개되는 전시에는 작가로서의 지난 40여년 궤적을 보여주는 140여점이 나왔다. 작가는 초기의 여성주의 서사를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감성을 설화, 신화, 역사와 함께 엮은 조각, 판화, 사진, 태피스트리, 아티스트북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인다. 1980년대 작품부터 2022년 신작까지 망라한다. ‘자유낙하’는 1994년의 작품 제목이며 판화이자 아티스트북 형식으로 제작돼 평면 매체에 입체적으로 접근한 스미스의 조각가적 면모를 동시에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자유낙하’는 평생 작업의 키워드로 “자신이 어디로 갈지 두려움 없이 살고 있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키키 스미스

키키 스미스는 70년대 후반부터 제니 홀저, 톰 오터니스 등 뉴욕의 행동주의 미술가 그룹인 콜랩에 참여했다. 1980년대 들어 인체 장기를 묘사한 작품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에이즈, 임신 중절 등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로 신체에 대한 담론이 성행했던 시기였다. 이 당시 스미스는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생명의 취약함, 불완전함에 대해 숙고하는 한편, 생리혈, 땀, 눈물, 정액 등 신체 분비물과 배설물까지 가감 없이 다뤘다. 이는 혐오 미술로 불리며 그를 단박에 미술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그 시절의 대표작 ‘소화계’(1988)는 혀부터 항문까지의 소화계 전체를 라디에이터처럼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주철로 제작했다. 작가는 실내 곳곳으로 열을 방출하는 라디에이터의 기능이 마치 에너지를 흡수해 신체 곳곳으로 영양을 배분하는 소화계의 역할과 맥을 같이 한다고 설명한다.

이전까지 장기 등을 소재로 익명성을 내세우던 작가는 1990년대 이후 작품 속에 자신을 본격 등장시킨다.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판화로 제작한 ‘자유낙하’가 그런 예이다. 판화가 자미엘로와 함께 제작한 이 작품은 나체의 스미스를 담은 사진을 적외선 필름으로 동판 위에 옮김에 따라 거칠고 껄끄러운 질감이 더해졌다. 작가는 이 작품을 책의 형태로 접어서 보관하고 관람자는 감상을 위해 이 작품을 차례로 펼쳐나간다. 작품과 관람자가 신체적 관계를 맺는 이 과정은 2차원의 판화와 3차원의 조각의 경계를 넘나든다.

‘YA’(2001, 청동).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작가는 2000년대 들어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다. 과격하고 도발적이던 이전 시기의 작품과는 달리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띠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다양한 배경의 종교 신화 문학에서 도상을 취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직조하는가 하면, 인간을 넘어 동물과 자연, 우주와의 교감을 소재로 삼으면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 시기 대표작인 청동 조각 ‘황홀’(2001)은 늑대의 배를 뚫고 당당히 걸어 나오는 여성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빨간 망토’ 우화에서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가르자 할머니와 함께 걸어 나오는 소녀를 모티프로 했다. 르네상스 시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달 위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의 전통적인 도상이 갖는 가부장적인 여성상을 거부한다.

‘하늘’(2012, 태피스트리).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작가는 이후 동화를 모티프로 한 드로잉 작품이나 태피스트리 연작을 계기로 보다 몽환적이고 상징적인 세계를 모색한다. 중력의 간섭 없이 화면을 자유롭게 유랑하는 듯한 동화적 도상, 미스터리한 화면 구성, 불명확한 요소들이 충돌하며 생성해 내는 새로운 이야기들에서 과거와 달라진 키키 스미스를 만날 수 있다.

전시의 세부 구성은 연대순 나열이나 ‘여성’, ‘신체’와 같이 작가를 수식해 온 기존의 규정적 접근에 기반하지 않는다. 대신 키키 스미스 작품세계에서 핵심적으로 발견되는 ‘이야기적 요소’, ‘반복적 요소’, ‘에너지’ 같은 몇몇 구조적 특성에 기초해 구분했다.

전시 개막에 맞춰 출판사 열화당과 함께 출간하는 전시 연계 단행본은 국내에 키키 스미스를 처음 제대로 소개하는 책이다. 작가에게 손쉽게 접근해 볼 수 있도록 기존의 미술관 도록 형식이 아닌 대중 서적 성격으로 기획됐다. 이진숙(미술사가), 신해경(미학 연구자), 최영건(소설가)이 필자로 참여해 작가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이들은 매체 탐구에 기초해 작가를 폭넓게 소개하거나 에코페미니즘, 문학적 관점에서 키키 스미스를 소개한다. 전시는 3월 12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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