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가짜 정치인 탄생기

국민일보

[특파원 코너] 가짜 정치인 탄생기

전웅빈 워싱턴특파원

입력 2023-01-25 04:08

미국 뉴욕주는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하원 석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곳이다. 공화당은 민주당 아성(牙城)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하원 의석 4개를 빼앗아 왔다. 여야 의석 배분은 ‘19대 7’에서 ‘15대 11’로 뒤바뀌었다.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뉴욕에서 민주당이 기존 지역구를 지키기만 했어도 공화당 의석수는 222석에서 218석으로 줄어 과반 ‘매직 넘버’만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뉴욕의 붉은 물결 원인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민주당의 오만과 무능을 공통으로 꼽는다. 진보 성향 지지층 밀집 지역이니 ‘집토끼’ 전략만 잘 짜면 승리할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이 민심 이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실책이 ‘범죄와 공권력’에 대한 것이었다. 뉴욕 롱아일랜드 나소카운티에서 지난해 발생한 7대 범죄 건수는 7394건으로 전년 대비 41% 폭증했다. 자동차 절도가 72.5% 증가했고, 주택 절도도 55.8% 늘었다. 하지만 뉴욕은 이들 범죄자에게 불구속 재판 권한을 광범위하게 부여하고 있었다. 뉴욕은 2020년부터 경범죄와 비폭력 중범죄 피고인에 대한 현금 보석금 제도를 폐지했다. 부자든 빈자든 동일하게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하자는 취지에서다.

뉴욕 부시장을 지낸 민주당 전략가 하워드 울프슨은 패인으로 “민주당은 현실에 안주하고 단절돼 보석 개혁안이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범죄와 무질서에 대한 유권자 우려는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결정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대신 게리맨더링에 집착했다. 확실한 승리를 따낼 지역 위주로 기상천외한 선거구 재조정에 나섰다가 법원으로부터 ‘위헌’ 결정까지 받았다. 울프슨은 “도가 지나친 선 긋기였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식 정책만 외치면 당선될 것이라는 오만이 유권자들을 오판했다는 것이다.

그 틈을 파고든 게 희대의 선거 사기꾼으로 전락 중인 공화당 하원의원 조지 산토스다. 그는 범죄율 급증 지역 나소카운티가 있는 뉴욕 제3선거구에서 민주당 로버트 짐머맨을 따돌리고 승리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경력 대부분은 날조됐다. 그의 거짓은 특히 지역 유권자 맞춤형으로 꾸며졌다. 뉴욕 명문 사립 호레이스맨 출신, 2500마리 넘는 개와 고양이를 구한 동물구호단체 운영, 대형 투자은행 시티그룹과 골드만삭스에서 일한 노련한 월스트리트 금융인 이미지 등을 선전했다. 브라질 이민자 아들이자 자랑스러운 미국 유대인, 동성애자라는 정체성도 주장했다. 어머니가 9·11 테러 희생자라고도 했다. 백인과 아시아계가 주로 사는 지역구 인구 구성을 노린 것으로,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산토스는 자신을 ‘아메리칸 드림의 구체화’라고 묘사했고, 유권자들이 듣기 원하는 ‘범죄와의 전쟁’을 캠페인으로 내세웠다.

언론은 이번 사건을 미 선거 역사상 가장 비현실적인 ‘사가(saga)’로 묘사하고 있다. 워낙 거짓이 많아 진짜 산토스가 누구인지 찾는 게 일이 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산토스는 사임 요구를 거부하고 있고, 한 표가 아쉬운 공화당 지도부도 제명에 소극적이다. 공화당 운영위는 중소기업위와 과학우주기술위에 산토스를 배정하라는 권고까지 했다. 유권자에겐 그를 퇴출할 권한이 없다.

연방 하원의원 산토스의 탄생은 여야 모두의 정치 실패가 낳은 산물이다. 가짜 정치인은 이제 입법 과정에 관여하고, 청문회에서 증인들을 다그치며 진실을 추궁하는 역할도 맡게 된다. 수준 낮은 정치가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붕괴하는 장면은 오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저질 정치인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생태계가 이미 구축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전웅빈 워싱턴특파원 imung@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