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정치인에게 건네는 신년 덕담

국민일보

[여의도포럼] 정치인에게 건네는 신년 덕담

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

입력 2023-01-26 04:04

한국에서 정치인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선거 비용 장만하고 지역구 관리하느라 발품 많이 팔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선출직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다음 공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이 보는 시선은 냉랭합니다. 정치에 첫걸음을 들여놓을 땐 소명으로 정치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지만, 이런저런 일 겪다 보면 그게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절감하기 다반사입니다.

한국 정치는 다이내믹 그 자체라고 하죠. 대표적인 게 공천일 것입니다. 공천 때마다 물갈이가 금과옥조로 내걸립니다. 지금의 21대 국회에서 초선 의원 비율은 51%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치라고 합니다. 17대 국회 때는 전체의 근 3분의 2가 물갈이됐습니다. 62.5%가 초선이었습니다. 혁명이 아니고 이런 물갈이가 있을 수 있겠냐 하지만 사실입니다. 국회의원 당선증 받는 다음 날부터 다음 공천을 생각해야 하는 만큼 소신껏 살아가기 참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스템으로 공천한다지만 저잣거리 표현으로 줄서기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화려한 경력과 탄탄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격렬한 다이내믹을 뚫고 국회에 들어와도 철저하게 실행하는 ‘선수 우선 원칙’에 의해 존재감은 미약한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은 특권의 대명사로 인용되곤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폐지해야 하는 제도로 국회의원의 면책, 불체포와 같은 특권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회의원 특권이 거론될 때마다 비유되곤 하는, 자전거 타고 등원하며 복도에 주저앉아 의정보고서 준비하는 북유럽 의원들 사진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앞에서는 존경하는 듯 모두가 의원님, 의원님 하며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만 뒤통수는 근질근질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 어려움 없는 직업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없는 낙선 이후의 삶은 웬만한 멘털을 갖지 않고서는 적응이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권력이란 갖고 있을 때는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박탈감과 허탈감으로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력을 많이 누리면 누릴수록 상실의 후유증은 비례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치 낭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발품 많이 팔아야 하는 정치인으로는 한국이 으뜸일 것입니다. 하루 저녁에 최소 세 군데는 들러야 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일정이고요. 지역구 관리나 선거 비용이 전보다는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돈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알아둘 이것이 있습니다. 얼굴 비췄다고 표 주고, 안 나타났다고 표 안 주는 국민의 의식 수준은 넘어섰다는 것을요. 여전히 그런 수준의 국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이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정치는 소명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건네고 싶네요. 특권이란 특권은 모두 내려놓겠다는 생각으로 올 한 해를 지내보면 어떠할는지요. 마침 올해는 선거가 없기에 개혁의 발걸음을 크게 디뎌볼 만한 해입니다. 그리고 의원 활동하면서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네요. 이를테면 3선 정도 하면 어떤 분야에서는 그 누구보다 정통한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고 실천해 보세요. 그러면 권력 후유증을 겪는 정치인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며, 진정성이 담긴 ‘존경하는’ 접두어가 항상 붙어 다닐 것입니다.

막스 베버는 저작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세 가지 덕목이자 자질을 들고 있습니다.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 자기 결정과 행위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균형감각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오늘날처럼 편 가르기와 균열의 정치로 자기들 영역에 갇혀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상황에서는 균형감각이 가장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종교의 탄생이 그러하고, 철학의 태동이 그러하며, 역사의 형성이 그렇습니다. 개인의 성숙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신년 덕담으로 건넨 몇 마디가 마음 한구석 아주 자그마한 아픔으로 다가왔다면 이미 여러분은 중심 근처에 있다는 증표입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군말을 하여 객쩍네요. 덕담이길 바랍니다.

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