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장관 출신 예술위 위원장

국민일보

[내일을 열며] 장관 출신 예술위 위원장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입력 2023-01-26 04:06

새해 들어 문화예술계의 빅뉴스는 지난 10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위원장으로 정병국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선출된 것이다. 앞서 문체부는 지난 3일 예술위 8기의 예술위원 후보자 및 추천위원을 공개한 데 이어 10일 예술위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예술위원들은 호선으로 정 전 장관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2020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반영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에 따라 예술위 위원장 선임이 문체부 장관 임명에서 위원 호선으로 바뀐 데 따른 것이다.

문화예술계는 전직 장관에 5선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인 정 위원장 선출에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크다. 정 위원장이 이명박·박근혜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원죄가 있는 국민의힘 소속이라는 점이 불안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화예술계 단체장 물갈이’ 논란을 일으켰던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이 이번에 추천위원으로 위촉된 것도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실제로 지난 18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등 70개 문화예술단체는 ‘정병국 위원장과 8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발표문을 내놨다. 이들은 예술위가 문체부는 물론 정치권력에 예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리고 윤석열정부 들어 박보균 문체부 장관이 약속한 블랙리스트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도 마련되지 않은 데 이어 ‘윤석열차’ 검열 사건까지 발생했다면서 8기 예술위원들에게 블랙리스트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그런데 문화예술계에서 정 위원장에 대해 우려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정 위원장이 예술위의 문예진흥기금 확충과 위상 강화라는 고질적 과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최근 예술위 직원들을 상대로 한 취임 일성으로 고갈 위기의 문예진흥기금 확충을 미션으로 내걸었다. 문예진흥기금은 2003년까지 각종 예술 및 스포츠 행사 입장료에서 일정액을 거둬들여 5000억원이 모금됐다. 하지만 준조세 정비 방침에 따라 문예진흥기금 부과가 폐지된 후 예술위는 2004년부터 원금을 헐어 쓰고 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기금이 917억원에 불과하다.

현재 예술위 예산은 2022년 기준으로 5345억원이다. 문예진흥기금과 골프장 수입 등 자체 수입 710억원, 복권기금 전입금 등 정부 수입 3000억원, 기금 운용 등 여유자금 회수 1200억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복권기금 전입금 1700억원은 소외층의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문화누리카드(통합문화이용권)에 모두 쓰이게 돼 있다. 예술위가 모델로 삼은 영국예술위원회가 복권기금을 문화 인프라 구축과 순수 예술 지원에 사용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문화 향유에만 사용해야 하는 데서 차이가 크다. 지난해 예술위의 사업비 3655억원 내역을 보면 문화 향유가 2262억원으로 가장 많으며 창작 지원 534억원, 인력 육성 293억원, 예술인 생활자금 239억원 등의 순서로 돼 있다.

사실 예술위가 문체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재원 문제 때문이다. 영국예술위원회의 예산은 크게 문화미디어스포츠부로부터 받는 국고와 국립복권기금 전입금(전체 복권 수익금의 20%)으로 충당된다. 국고와 복권기금의 경우 3년 단위로 지원 규모가 결정되기 때문에 영국예술위원회는 어느 정도 독립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다.

정 위원장이 문예진흥기금 확충을 발표한 것은 어쨌든 반갑다. 다만 단순히 기금 확충만이 아니라 전체 재원 구조를 바꿔야 예술위의 조직 안정과 위상 강화를 꾀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위의 변화만이 제반 예술 환경의 개선으로 이어진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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