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농구, 좋아하세요? 음악은요?

국민일보

[혜윰노트] 농구, 좋아하세요? 음악은요?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입력 2023-01-27 04:04 수정 2023-01-27 04:04

내 주위 모두가 농구에 미쳐 있다. 2023이라는 낯선 숫자를 흐린 눈으로 바라볼 때만 해도 이런 전개가 진행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이유는 당연히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때문이다. 원작은 익히 알려진 대로 1990년에서 1996년까지 연재된 일본 만화 ‘슬램덩크’다. ‘슬램덩크’의 인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슬램덩크’는 이 작품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기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건 그를 사랑한 이들의 피부뿐, 자칭 농구천재 열혈 강백호 등 ‘슬램덩크’ 속 인물들은 30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연소하며 반짝인다.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십중팔구, 마치 과거로 돌아가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볼을 붉히며 각자의 추억을 헤집었다. 제법 차분한 듯 말하고 있지만 지금 글을 쓰는 사람도 그 가운데 하나다. 두세 달에 한 번 발매되던 단행본을 사려고 동생과 함께 어떻게 용돈을 모았는지, 어떤 등장인물과 어떤 경기의 어떤 장면을 제일 좋아했는지, 불꽃 남자 정대만의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의 원어가 사실 어떤 맥락을 가진 문장이었는지를 유물 발굴처럼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그를 만났다. 자전거를 탄 서태웅을.

서태웅은 ‘슬램덩크’의 주요 등장인물이지만 작품상 그리 깊이 있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떨리듯 아름답게 묘사된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집중력을 소진했는지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북산고의 주전 선수 가운데 노출된 정보가 가장 적다. 덕분에 캐릭터 묘사는 쉽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눈에 띄는 미모로 친위대를 몰고 다닌다. 농구만큼 잠을 사랑하고, 그런 잠을 많이 자기 위해서인지 단지 가깝다는 이유로 학교를 택한다. 보통 이어폰을 낀 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한다. 그러고 보니 서태웅은 자주 음악을 듣고 있었다.

서태웅이 어떤 노래를 듣는지는 자주 드러나지 않는다. 그 드문 가운데 ‘뉴 파워 제너레이션(New Power Generation)’과 ‘다이아몬즈 앤 펄스(Diamonds and Pearls)’가 있다. 모두 팝의 전설이자 천재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은 음악가 프린스의 곡이다. 두 곡이 실린 앨범 ‘그래피티 브리지(Graffiti Bridge)’와 ‘다이아몬즈 앤 펄스(Diamonds and Pearls)’가 각각 1990년과 1991년에 발표됐으니 단지 만화 연재 당시 인기곡을 듣고 있었던 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프린스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고, 1990년은 ‘퍼플 레인(Purple Rain)’(1984)의 대성공 이후 소속사와의 갈등 및 각종 기행이 이어지며 대중 사이 호불호가 갈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 모든 단서는 서태웅이 프린스를 꽤 좋아하던 음악 좀 아는 10대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더구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며 ‘오직 사랑을 나누는 것과 음악만이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 외치는 노랫말이라니. 흑백 네모 칸 속에 갇혀 있던 서태웅에게 오색찬란 총천연색이 입혀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영화 ‘러브레터’로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첫사랑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산에서 추락해 죽어가며 부른 노래는 ‘푸른 산호초’였다. 당연히 슬픈 발라드라고 생각했던 노래는, 알고 보니 가수 마쓰다 세이코의 깜찍하기 그지없는 전설의 아이돌 시대를 대표하는 곡이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남자 후지이 이츠키를 몇 배나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노랫말에 담긴 깊은 연정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엉뚱했던 그가 몹시 애달프고 사랑스러워졌다.

단지 소리일 뿐인 음악은 이렇게 이야기와 포개지며 무엇이든 다채롭게 물들인다. 그래서 음악이 좋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강백호에게 ‘농구, 좋아하세요’ 묻던 채소연의 심정으로 아무나 붙들고 묻고 싶어졌다. ‘음악, 좋아하세요?’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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