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나의 이야기, 하루키의 이야기

국민일보

[혜윰노트] 나의 이야기, 하루키의 이야기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입력 2023-02-03 04:04

와세다대학교 가는 길은 설레면서도 약간 두려웠다.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캠퍼스 안에 지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 지나치게 근사할까 봐서. 이상한 두려움이었다. 평이하고 잘 읽히는 언어로 인간의 깊은 내면을 그리는 하루키 작품을 떠올리면,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위압감이 들 정도로 화려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건축물로서만 의미가 있다면 분명 실망할 것 같았다.

하루키 도서관은 2021년 10월 1일 개관했다. 작가가 40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며 모은 책과 음반, 온갖 자료를 모교에 기증하면서 시발점이 된 도서관은 기부자들이 만들었다. 도서관에 입장하면서 처음 받은 것도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운영 모금’ 용지였다. 입장료는 없다. 티켓 대신 번호 태그를 목에 건 방문객은 자유롭게 1시간30분 동안 도서관을 다닐 수 있다.

과연 도서관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오디오룸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재즈를 들었다. 대학생일 때 재즈바를 운영했고, 그 재즈바의 한구석에서 쓴 단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의 도서관이라는 걸 환기했다. 무엇보다 책장과 일인용 소파가 인상적이었다.

하루키가 작품을 쓸 때 참고한 책들, 전 세계로 번역된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책장의 위 칸은 비워져 있었다. 손 뻗어 닿는 데까지만 채운 것이다. 천장 끝까지 책을 꽂아 특별한 분위기를 만드는 전시용 책장이 아니었다. 필요할 때 꺼내 열람할 수 있었다. 허세가 없는 책장이 작가 스타일과 닮았다.

책을 한 권 뽑아서 벽을 친 듯 몸을 완벽히 가려주는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재즈 리듬에 몸을 맡기고 책을 펼치자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도서관에 와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책과 자료를 읽는다는 것. 이 이야기 속에는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간질거릴 정도로 흐뭇하고 간절한 정서가 흐른다.

하루키에 대해 모든 자료를 섭렵해 쓴 임경선 작가의 에세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은 일본어로도 번역 출간돼 이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책에는 학생 시절 하루키가 도서관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우리 집 근처에 마을 도서관이 있는데 정말 좋아요. 아침에 아무도 없을 때 서가를 돌다 보면 가슴이 찡하지요. 오늘은 뭘 읽어볼까, 두근거리기도 하고요.” 재수생 시절부터 다니던 고향 고베시의 아시야 우치데 도서관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다. 서가를 보고 가슴이 찡했던 십대의 하루키는 이제 칠십대의 작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단 도서관을 갖게 됐다. 이 도서관의 서가를 보며 누군가 가슴이 찡하기를 바라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매일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어려워도 낙관이, 이상이 필요하죠. 작가의 일은 이런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루키 도서관 개관 즈음해 작가는 이런 소회를 밝혔다. 문단과도 친화적이지 않고 매체 인터뷰나 독자 만남을 좀처럼 갖지 않는 작가. 결코 사교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자신의 책을 기다려주는 독자에 대한 소중한 감각을 잃지 않는 작가. 하루하루 빠지지 않고 운동하고 일정량의 원고를 쓰는 루틴을 유지하는 작가. 요령을 부리지 않는 성실한 작가의 도서관에서 나의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도서관 안의 카페 ‘오렌지캣’에 놓인 검은 피아노는 작가가 운영했던 재즈바의 피아노를 옮겨 놓은 것이다. 그 피아노 앞 테이블에서 재즈를 들으며 점심으로 카레 요리를 먹었다. 이날의 내 이야기에는 책과 재즈, 카레가 등장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냄새만 어렴풋이 남고 사라질 것이다.

작가의 도서관은 당연히 작가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어둠과 고통을 직면하는 작품들은 읽는 사람을 품는다. 방문객은 고립되지 않고 세상의 많은 인물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고유한 나 자신으로 만드는 이야기 속에는 문학 작품이 녹아 있다는 것을 작가의 도서관은 일깨웠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