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반일 광풍이 지나간 자리

국민일보

[세상만사] 반일 광풍이 지나간 자리

강창욱 산업부 차장

입력 2023-02-03 04:06 수정 2023-02-03 04:06

반일(反日)몰이는 쉽지만 언제나 잘 먹힌다. 서로 남처럼 굴다가도, 또 그렇게 물고 뜯다가도 일본과의 대결 구도 앞에서는 단단히 결속해 이구동성 “일본 타도”를 외친다. 스포츠와 달리 정치에서 반일 구도는 일본에 정말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대놓고 “싸우자”며 달려들어서 상대국으로부터 원하는 걸 얻어내리라고는 정치인들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개 그들의 목적은 일본이 아니라 이곳의 정적들을 함께 몰아세워 줄 여론을 조직하는 데 있다.

현직 청와대 민정수석이 “일본에 쫄지 말고 싸워서 이기자”며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노래 ‘죽창가’를 들고나온 게 2019년 7월이었다. 그는 연일 수십 건의 일본 관련 게시물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반일 정서 자극에 온 힘을 쏟았다. 품격도 없었거니와 정부의 본분인 외교를 포기한 행동이었다. 정작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공식 외교 라인은 꿀 먹은 벙어리였고 대통령은 불편한 기색 한 번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반일을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서는 행동으로 포장했지만 실은 외교적 무능력을 감추고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데 국민 공분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당시 반일몰이는 청와대에서 나오는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선동이었는데 그 선동에 너무 쉽게 온 나라가 같이 씩씩거렸다.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구호를 내세운 ‘노재팬(NO JAPAN)’ 운동이 마른 들판을 쓸고 가는 불길처럼 번졌다. 그 불매운동에 유니클로, 데상트, 무인양품 같은 국내 일본 브랜드 매장엔 발길이 뚝 끊겼다. 편의점, 대형마트, 동네마트 할 것 없이 상점 진열대에서 맥주를 비롯한 일본 식료품을 깡그리 퇴출했다. 여행 블로그나 유튜브 여행 채널에는 일본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올라오지 않았다.

반일 감정으로 똘똘 뭉칠수록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죽창들은 이 땅에서 서로를 겨눴다. 일본 여행을 가고 싶어도 남들 눈이 무서워 못 갔고, 갔다 와서도 “일본 갔다 왔다”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일본의 ‘일’자만 나와도 눈을 흘기는 ‘매국노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다. 당시 한 지인은 “올해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가려고 전부터 계획했는데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당할까 봐 못 가게 됐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유니클로나 무인양품 주변을 서성이며 그 매장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지 감시했고, 일부는 사진까지 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개·돼지’라고 비난했다. 어느 지역 대형마트엔 ‘쪽발이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기세등등하게 붙어 있었다.

노재팬 운동 초기 일본 마이니치신문엔 “지금까지 한국에선 4번의 일본 불매운동이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다”는 칼럼이 실렸다. 그때 사람들은 “이번엔 다르다”며 이를 갈았는데 결국 5번째 불매운동도 흐지부지 끝났다. 일본 맥주가 돌아온 지 오래고 포켓몬빵은 없어서 못 산다. 유니클로는 일부 매장을 접긴 했지만 매출 반등을 시작했다. 연초 개봉한 ‘슬램덩크’ 극장판은 한 달도 안 돼 200만 관객을 넘겼는데 “일본 만화니 보지 말자”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한국의 가장 큰 일본 소비인 여행은 어떤가. 지난해부터 많은 사람이 ‘무비자 입국 허용’ 발표를 오매불망 기다렸고, 국경이 열리자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저 마이니치 칼럼을 옮기며 “약오른다. 똘똘 뭉쳐 꼭 성공하는 거 보여주자”고 했던 맘카페에도 일본 여행 글이 쏟아지고 있다.

전방위 보이콧에 몇몇 일본 기업의 한국 매출이 줄고 후쿠오카 등 일부 지역 여행산업에 타격이 있었지만 팬데믹 충격에 비할 바 아니었고 일본 정부가 백기를 든 적도 없다. 불매운동의 이유였던 수출 규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노재팬 운동은 슬그머니 끝난 셈이다. 청와대 주도 일본 불매는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일본 우익 등에 조롱당하기 좋은 또 하나의 선례만 남겼다. 반일몰이에 동조한 국민만 우습게 됐다.

강창욱 산업부 차장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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