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서 본적 없는 선홍색 풍경…‘경계인 이우환’ 日서 만나다

국민일보

국내서 본적 없는 선홍색 풍경…‘경계인 이우환’ 日서 만나다

효고현립미술관서 회고전

입력 2023-02-05 22:27
지난 1월 중순 한 관람객이 일본 고베의 효고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 회고전을 찾아 작가의 초기 회화인 ‘풍경’ 연작(1968)을 감상하고 있다.

지난 1월 중순 일본의 항구도시 고베의 효고현립미술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이 미술관에서 이우환(87·아래 사진) 작가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어 일본 출장길에 찾았다. 이우환은 2021년 8월 서울옥션에서 작품 ‘동풍’이 31억원에 낙찰되며 한국의 생존 작가가 가운데 처음으로 작품 가격이 30억원을 넘긴 작가가 됐다. 이번 전시는 앞서 도쿄 국립신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의 순회전이라 작가 이우환이 한국을 넘어 일본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한다.


이우환 작가가 일본 미술계의 집중 조명을 받는 이유는 뭘까. 193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이우환은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를 중퇴하고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한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과 미국 등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왔다. 일본대학 철학과를 나온 그는 처음 미술평론가로 데뷔했다. 당시 일본 미술계는 재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설치 미술이 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우환은 이를 모노하(物派)라 명명하며 이 흐름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이론가를 넘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시에는 그가 모노하 이전에 추상표현주의를 시도하던 1960년대 회화 작품 ‘풍경’(1968) 연작이 등장했다. 선홍색으로 캔버스를 칠한 추상적인 화면으로 심리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면의 시간을 보냈을, 거장의 청년 시절을 상상하게 한다.

본격적으로 모노하 시절을 보여주는 전시실에는 자연물인 돌과 문명의 산물인 철판, 그리고 유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한 ‘관계항’ 연작을 볼 수 있었다. 1960∼70년대 제작한 ‘관계항’ 연작은 소재의 물성 그 자체를 통해 관객에 호소하는 작품인 것이다. 정육면체 형태의 철판 모서리에 솜뭉치를 두른 작품은 국내에서는 본 적이 없다. 솜의 부드러움과 철판의 단단함의 대비는 어떤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시적인 발산을 한다.

사진은 빈 캔버스 그대로 두거나(위 사진) 철판 모서리에 솜뭉치를 두른 ‘관계항’ 연작으로 1960∼70년대 작품을 재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당시 돌, 철, 유리 등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관계항’ 연작을 선보이며 일본의 모노하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매년 독일 등 유럽에서 전시를 하는 등 세계적인 작가로 뻗어간다. 때마침 1980년대 들어 일본 전후 미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일면서 이우환과 모노하 작가들이 동시대 미술 무대에서 주목받는다. 작가에게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와 베르사이유 궁전, 남부 아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등 곳곳에서 전시할 기회가 생겼다.

1970년대 이후 작가의 작업세계는 회화로 넘어간다. 점 시리즈와 선 시리즈가 등장한 것이다. 붓에 물감을 듬뿍 묻힌 뒤 한 점 한 점 점찍기를 반복하고, 선을 긋고 다시 긋는 수행적인 과정에서 점점 물감이 옅어진다. 그리하여 캔버스에는 결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작업하는 과정까지 상상이 되며 시간의 흐름까지 담아낸다.

1980년대부터는 ‘바람’ 시리즈가 등장한다. 금욕적이던 화면에는 붓질이 회오리친다. 서체를 연상시키는 이 작업에서는 바람 소리가 화면에서 나오는 듯하다. 작가는 바람 연작을 통해 혼돈을 표현하다가 붓질이 정돈된 ‘조응’ 시리즈로 넘어간다. 현재는 붓질을 반복해서 사각형의 형태를 만드는 ‘대화’ 연작을 하고 있다. 며칠에 걸쳐 덧칠해서 완성하는데, 사각이라는 단순한 형태지만 붓질 덕분에 산맥 같은 땅의 굴곡이 숨어 있는 듯하다. 작가는 “약간의 붓 터치로 회화성을 강화함으로써 회화의 지평을 열었다”고 자부한다.

공간을 채운 설치 작품도 볼 수 있다. 관계항 연작을 전시한 전시실에서 회화를 보여주는 전시실로 이동하는 복도의 하늘이 보이는 공간에 작가는 전통 난방시스템인 온돌의 구들을 연상시키는 넓고 납작한 돌을 깔았다. 관람객은 마치 원시적 주거지를 연상시키는 이 거칠고 유동적이며 생명력 있는 공간에 들어가 걸으면서 작품을 체험한다. 걸을 때 나는 ‘삐거덕’ 소리가 더해져 관객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시대, 날것의 주거 공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관계항-거처’로 명명된 이 작품은 2017년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프랑스 라 투레트 수도원에 설치된 적 있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면 이우환의 또다른 설치 작품을 볼 수 있다. 효고현립미술관은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했다. 소라고동처럼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아주 가는 실을 늘어뜨린 ‘무한의 실’은 아주 가늘어 신에 대한 간구의 마음이 절로 나온다. 이 작품은 2021년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소개된 바 있다.

효고현립미술관 미노 유타카 관장은 “우리 미술관 관장이 된 이후 뉴욕, 파리 등 해외에서 이우환 선생을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개인전을 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는데 그 소망이 실현돼 기쁘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전시는 60년대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선보여 뜻깊다”면서 “이우환 작가는 한국과 일본,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개방적인 태도로 접근한다”고 평가했다. 12일까지.

고베=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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