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관치가 춤추는 요지경 경제

국민일보

[여의춘추] 관치가 춤추는 요지경 경제

고세욱 논설위원

입력 2023-02-24 04:07

요지경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당장 ‘권력자의 자식이 이해하기 힘든 거액을 받아도 부모와 따로 살면 뇌물이 아니다’, ‘대의를 위해선 절차상의 위법 행위를 해도 무방하다’는 식의 황당한 판결들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다. 구시대 유물 격인 ‘당정 일체론’이 등장하고, ‘당대표 방탄 다수당’이 떵떵거리는 정치 현실도 혀를 차게 한다.

정치·사회의 난맥상이야 익히 알려졌지만 경제도 요새 이 못지 않다. 민생 경제에 올인하겠다는 대통령과 정부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관치 요지경으로 정부의 철학과 정책 방향이 갈수록 꼬이는 현실은 심히 우려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공공요금은 상반기 동결 기조로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적자 공기업의 현실을 반영해 점진적 인상을 하겠다는 방침을 접었다. 난방비 폭탄에 끓는 민심을 의식한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곧바로 “정책이 과학이 아닌 이념과 포퓰리즘에 기반하면 국민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요금 동결을 밝힌 자리에서 문재인정부의 공공요금 억제 부작용을 비판한 것은 뜬금없다. 같은 동결이지만 전 정부 조치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것이고 현 정부는 과학적 판단에 따랐다는 것인지. 관을 앞세워 기업의 적자를 묵인하는 건 마찬가지다. 더욱이 내년 총선이 코 앞인 하반기에 공공요금을 올리겠다? 과학을 내세우기가 쉽지 않을 거다.

은행권 돈 잔치에 대한 공세는 어떤가. 은행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 예대금리차 확대로 떼돈을 벌어 임직원에게 퍼준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이 돌아가면서 은행의 ‘공공재’ 성격을 들먹이며 대출금리 인하를 노골적으로 유도하는 모습은 지나치다. 정작 돈 잔치 판을 깔아준 건 정부다. 정부는 예대마진 공시를 의무화해 ‘대출금리 인하와 예금금리 인상’을 유도했다. 그러다 레고랜드 사태로 돈이 은행권에 몰릴 조짐이 있자 이번엔 은행에 ‘예금금리 인상 억제’를 주문했다. 이로 인해 예대마진은 더욱 늘었다. 오락가락 관치 속에 정부가 주창하는 자유경제의 정신은 유명무실해졌다.

더 큰 문제는 갈수록 산으로 가는 인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3일 정기총회에서 회장 직무대행으로 김병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추대했다. 노무현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지방자치 분야 전문가다. 경제나 산업 쪽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윤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 몸 담았다는 것 외엔 이 자리에 올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내며 이사회에서도 단독 대표이사 후보로 추천된 구현모 KT 사장은 23일 돌연 연임을 포기했다. 당초 구 사장이 연임 의사를 밝히자 정부 입김이 미치는 국민연금이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고 공정거래위원회가 계열사 현장 조사를 벌였다. 그 와중에 구 정치인, 관료, 방송인 등 30여명이 후보 신청을 했다. 재계 서열 12위의 민간기업 수장을 뽑는데 ‘윤심’의 방향을 탐문한다. 연임이 유력하다던 금융지주 회장들이 지난해 연말부터 순순히(?)자리를 물러났고 모피아 올드보이들이 메웠다. 3월 임기가 만료되는 5대 금융지주 사외이사들이 전체의 75%다. 용산과 여의도를 주시하는 봄맞이 낙하산들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이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1년6개월 만에 동결하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7%에서 1.6%로 하향 조정했다. 5%대의 고물가에도 경기에 초점을 맞춘 건 그만큼 비상이라는 얘기다. 아무리 금리를 올려도 고용과 경기가 뜨거워 노랜딩(무착륙) 시나리오까지 나오는 미국과 천지 차이다. 세계 최강국과의 비교가 무리라면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지난해 4분기 수출 상위 6개국 가운데 한국 수출 증가율이 -9.9%로 가장 저조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중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일제히 올렸는데 우리나라는 0.3% 포인트 내렸다. 막연히 중국의 리오프닝과 미국의 성장세에 기대며 경기를 낙관할 때가 아니다.

일사불란한 관치, 정교한 관치는 과거에 경제를 끌고 가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신냉전, 4차 산업혁명의 대변혁기에서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벌일 때 관치는 걸림돌일 뿐이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거시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고 민간이 주도적으로 난관을 헤쳐나가도록 길만 열어줘야 한다. 시스템 구축이 그리 어렵다면 전 정부 탓을 하지 말던가.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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