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들이고 비둘기 풀고… 리움 로비 ‘엄숙주의’ 깼다

국민일보

노숙자 들이고 비둘기 풀고… 리움 로비 ‘엄숙주의’ 깼다

이탈리아 ‘악동 작가’ 카텔란 개인전
현실 풍자 극사실 작품 38점 선보여

입력 2023-02-26 20:21 수정 2023-03-01 17:06
리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들. 사진 작품 ‘무제 2000’으로 기둥을 감쌌고 기둥 아래에는 한국의 노숙자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을 놓았다. 리움미술관 제공

지난 2021년 10월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재개관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은 권위주의적인 디자인의 로비가 뒷말을 낳았다. 기둥은 물론 인포메이션 카운터, 물품보관소 등 모든 구조물을 부와 권력의 상징인 검은색으로 치장해 위화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3)이 고대 종교적 성전 같은 로비의 권위주의에 한방을 먹였다.

리움의 새해 첫 개인전을 장식한 세계적인 악동 작가 카텔란은 로비에 노숙자 2명을 들여놓고 비둘기 수백 마리를 풀어놓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실물과 꼭 같은 극사실 조각이다. 입구에 기대 누워 있거나 기둥 아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숙자는 고대 신전 같은 이곳을 일거에 저자거리처럼 만들어버린다. 로비의 바닥과 천장 아래 곳곳에 참새처럼 앉아있는 비둘기 조각도 저자 거리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장치다. ‘고스트(유령)’라는 제목의 비둘기 작품은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초청받았을 때 ‘투어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것을 리움 버전으로 재설치한 것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도 비둘기는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줄여야할 만큼 혐오 조류가 됐다. 검은 기둥은 흰색 포스터로 감쌌는데, 코르크 마개를 입에 문 남자의 이미지가 있어 마치 ‘그 입 좀 다물라’고 조롱하는 거 같다. 로비 안쪽 벽면에는 코오롱스포츠와 게임업체 엔씨소프트 광고판이 붙었다. 삼성이 운영하는 리움에 웬 타 회사 광고인가 싶지만 이것도 카텔란의 작품이다. 이는 작가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초청받았을 때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배당받은 공간을 향수회사의 광고로 채운 것을 리움 버전으로 바꾼 것이다.

장 누벨, 렘 콜하스, 마리오 보타 등 3명의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리움 건축물의 권위에 흠집을 낸 것 같은 카텔란의 도발과 풍자는 역설적으로 리움의 로비를 살렸다. 리움의 건축물이 이처럼 활기를 띄고 친숙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보타가 설계한 로비 공간의 구석구석, 천장까지 숨은 그림 찾듯 눈길을 주게 하며 공간 자체를 느끼게 했다.

카텔란은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다양한 직군을 경험한 뒤 가구디자이너로 일하며 미술계에 데뷔했다. 일상의 이미지를 도용하고 차용하면서 모방과 창조의 경계를 넘나들어 뒤샹의 후계자로 평가받는다. 카텔란은 2019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테이프로 벽에 붙인 바나나 한 개(작품명 ‘코미디언’)를 12만 달러(약 1억4000만원)에 팔아 대중에게까지 유명해졌다.

‘우리(We)’라는 제목으로 지난 1월 31일 개막한 리움 개인전에는 경찰, 사제, 범죄자, 소년 등으로 분장한 극사실 조각을 통해 미술제도와 현실을 풍자하는 38점이 나왔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최대 규모다. 통상 기획전이 열리던 블랙박스가 아니라 장 누벨 설계의 상설전시장을 활용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층별로 공간 분할이 분명해 관람 집중도를 높였다. 7월 16일까지. 관람료는 무료.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