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보다 2살 선행학습하고 ‘돈 스픽 코리안’까지 [이슈&탐사]

국민일보

미국 애보다 2살 선행학습하고 ‘돈 스픽 코리안’까지 [이슈&탐사]

[욕망의 출발선, 영어유치원] <2> 돈 스피크 코리안

입력 2023-03-07 00:03

고액의 유아대상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이 인기를 끄는 핵심 이유는 미국 어린이들의 수업 교재를 1~2년 앞질러 공부하는 선행학습이다. 영어유치원에 입학한 만 4세가 미국의 만 6세 유치원 교재로 영어를 배우고, 졸업반인 만 6세는 미국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를 읽는다. 영어유치원의 교육 내용은 점점 어려워지고, 이 경향은 영어유치원 진학을 위한 사전 사교육(국민일보 3월 6일자 1면 참조) 시장으로 전이됐다.

대학입시에 시계를 맞춘 학부모들은 “영어를 일찍 끝내 두고, 나중에 ‘국수’를 잘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상위권은 수학, 최상위권은 국어가 가른다는 속설을 말한 것이다. 만 3세가 출발한 장거리 달리기의 초반은 미국 교과서(일명 ‘미교’) 선행학습이다.

빈칸이 많아진 테스트

‘레벨테스트’를 보려면 줄을 서야 한다는 한 유명 영어유치원의 진학 대비 교재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만 3세가 보는 이 교재에는 “What did you do last Saturday?(지난 토요일에는 뭘 했나요?)” 식의 질문이 있다. 만 3세의 경우 영어로 답변을 적는 것까지 요구되진 않지만, 입에서 곧바로 말이 튀어나와야 합격선이다. 모범답안은 “I went to a kids cafe with my father. I ate yummy things there(아빠와 ‘키즈카페’에 갔습니다. 거기서 맛있는 걸 먹었어요).”로 적혀 있다.

영어유치원의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사전 사교육’도 고난도로 변한다. 과외교사 A씨는 “유아가 외우다시피 하는 질문이 100~150개”라고 말했다. 또다른 20대 과외교사 B씨는 “요즘은 예전보다 빈칸이 더 많이 뚫려 있다”고 말했다. 종전까지의 레벨테스트는 ‘cat(고양이)’ ‘dog(개)’의 가운데 철자를 비워 두고 유아에게 ‘a’나 ‘o’를 채우게 했다. 요즘은 ‘rain(비)’의 ‘ai’를 채워야 하는 식이다. 앞으론 더 길어질 것이라고 과외교사들은 예상한다.

간단한 영어 문장을 쓰는 일은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이전에 대개 끝난다. 만 3세가 “I like to slide(나는 미끄럼틀 타기를 좋아한다)”라는 문장을 적는다고 해서 엄청난 영재로 취급받진 못한다. 20대 과외교사 C씨는 “최상위권 영어유치원에 합격하려면 다섯 문장 이상으로 한 단락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행학습이 불충분하다고 푸념하는 학부모는 있어도, 선행학습이 지나치다고 걱정하는 학부모는 드물다. 다만 영어교육 전문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취재팀 의뢰로 레벨테스트 대비용 교재를 직접 검토한 문영인 서울시립대 영어영문과 교수는 “인지 발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국어로도 어려운 것을 공부하고 있다” “‘쓰기’ 단원이 있다는 것부터 문제”라고 평가했다. 문 교수는 “만 3~4세가 짧은 문장을 여러 번 들어 따라 말할 수는 있지만, 읽고 표시하며 시험을 치르는 건 더 자라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돈 스피크 코리안”

많은 영어유치원은 입학설명회에서 유아가 1~2살 많은 미국 어린이의 ‘미교’로 공부한다는 점을 밝힌다. 서울 강남 한 유명 영어유치원의 경우 만 4세 학급은 미국 H출판사의 ‘K레벨’(미국의 만 5세) 교과서를 읽는다.

이 학급의 말하기 듣기 수업 교재도 미국 S출판사의 K레벨 파닉스 교과서다. 이 영어유치원의 만 5세 학급은 ‘G1~G2레벨’(미국 초등학교 1~2학년) 교과서로, 영어유치원 졸업반인 만 6세 학급은 ‘G2~G3레벨’ 교과서로 공부한다.

만 6세가 읽는 ‘G3레벨’ 읽기 교과서에는 “Do you think bringing wolves back to Yellowstone was a good idea?(늑대를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데려온 것이 좋은 생각이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이 적혀 있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놓는 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초등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에는 그림이 더 많다.

일부 영어유치원은 학원 공간이나 등하원 버스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한다. 영어유치원 보조교사였던 40대 D씨는 “원어민 교사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아이들에게는 ‘Don’t speak Korean(한국어로 말하지 말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Sorry, teacher(선생님 죄송합니다)’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학부모는 자녀가 ‘영어로도 사고하게끔’ 하는 조치라고 받아들인다.

30년 가까이 전국 영어학원에 원서 교재를 판매해온 E씨는 유아 영어교육의 상향 평준화를 체감한다고 했다. 교재를 주문하는 학원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과거 K레벨과 G1레벨을 배우던 나이의 아이들이 이제 G2~G3레벨을 공부한다는 것이다. E씨는 “서울 강남에서부터 어렵게 가르치니 주변에서 비슷한 교재를 따라 주문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교육의 난도(難度)가 교육의 질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했다. 이 교수는 “영어유치원 교육을 참관해 보니 과도하게 수준 높은 것이 많았다”고 했다. 문 교수는 선행학습 실태에 대해 “이런 사례는 해외에도 없을 듯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미교’는 일상생활에서 영어로 상호작용하는 미국 어린이에게 맞춰진 것이라서 한국의 동년배가 공부해도 힘든 수준인데, 이를 1~2년 앞질러 배우는 건 부담이 된다는 지적이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정진영 박장군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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