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꿈인가… 엄마의 꿈인가? [이슈&탐사]

국민일보

아이의 꿈인가… 엄마의 꿈인가? [이슈&탐사]

[욕망의 출발선, 영어유치원] <2> 돈 스피크 코리안

입력 2023-03-07 04:05
게티이미지

긴장한 표정의 엄마 맞은편에 작은 아이가 앉아 있다. 엄마는 “잘 해야 해. 엄마 꿈이야. 엄마 소원이야”를 반복한다. 아이는 “알았어”라고 대답하고, 둘은 결심한 듯 문을 열고 길을 나선다.

서울의 한 학습형 유아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 근처에서 자영업을 하는 A씨는 지난 2일 국민일보를 만나 이런 광경을 수시로 본다고 말했다. A씨는 ‘레벨테스트’라는 단어를 먼저 꺼냈다. A씨는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를 받으러 와 잠시 들르는 것인데, 아이에게 ‘엄마 꿈 이뤄줄 거지’ ‘소원이야’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엄마의 꿈을 이뤄주려 노력하는 애가 딱해 보였다”고 말했다.

엄청 울고 그래요, 힘들어서

2018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영어 영역이 절대평가로 전환되자 “영어 조기교육도 뜸해지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영어유치원의 숫자는 증가일로다. 무소속 민형배 의원실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의 반일제(하루 4시간 이상 교습) 영어유치원은 모두 811곳이다. 2016년엔 428곳이었지만 6년 만에 2배가 됐다. 전체 교육시장에서의 영어유치원 비중도 같은 기간 0.56%에서 0.98%로 늘었다.


저출생 속에서 영어유치원이 늘자 일반유치원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교육열이 높다는 서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에서는 일반유치원의 폐원 현상이 좀더 일찍 나타났다. 서울 강남 지역 학부모들은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보니 영어유치원 출신이 훨씬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일찍 시작된 경쟁 속에서 학부모들은 소문과 동향에 점점 예민해진다. 서울 강남에서 유아들을 교습하는 과외교사 김모씨는 “일부 학부모는 ‘일반유치원에 보내면 바보가 되지 않느냐’고도 말한다”고 말했다.

‘숙제 과외’를 해주는 과외교사들은 만 4~6세를 가르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강남구 대치동 등에서 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B씨(25)는 “아이들이 처음 학습식 영어를 접하면 어떤 반응이냐”는 질문에 “엄청 울고 그래요. 힘들어서”라고 말했다. B씨는 “안쓰러울 때가 많다. 유치원을 다녀온 직후 또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주 1~2회, 많게는 5회 숙제 과외 교사를 찾는다. 취학 전 미국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 실력을 완성해 두기 위해서다.

유아들의 영어 학습량과 어려움의 정도는 전보다 커졌다. 영어유치원 주변 사교육에 종사하는 이들, 과거 영어유치원에 자녀를 보냈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한 학부모는 “5년 전에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냈었는데, 지금 배운다는 학습량은 입이 벌어질 정도”라고 말했다. 과열 경쟁 피해자는 유아 본인이라는 말이 더러 회자되지만 유명 영어유치원의 레벨테스트 대기 순번은 줄어들지 않는다. 잠시 힘들더라도 적응만 하면 곧 ‘프리 토킹’을 할 것이란 기대가 학부모들 틈에 더욱 크다.

그것 때문에 보내는 거 아닌데

학부모들은 “영어만큼 ‘인풋과 아웃풋’(입력과 출력)이 정직한 과목은 없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영어에 노출시킨 빈도와 언어 능력은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한 학부모는 “미국인은 누구든 영어를 잘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대치동의 한 영어학원 강사 C씨(28)는 “영어유치원 아이들이 읽는 게 빠르고, 발음도 일반유치원 출신보다 좋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기대는 입시 영어 이해에 머물지 않는다. “중학생쯤엔 ‘영유’든 ‘일유’든 영어 성적이 비슷해진다”는 말이 돌면, 영어유치원 학부모들은 “단순히 그것 때문에 보내는 건 아닌데”라고 반응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영어권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면, 뭐가 됐든 나중엔 더욱 많은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학부모들은 믿는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학습식 영어가 큰 스트레스가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어유치원 유아를 접한 경험이 많다는 임상심리전문가 선우현정씨는 “특별한 상황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함묵증’으로 병원에 오는 아이도 있고, 극심한 소아우울을 겪는 만 4세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편안한 말을 쓰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듯했다”고 덧붙였다.

자녀의 꿈을 부모가 돕는 것인지, 부모의 꿈을 자녀가 이뤄주는 것인지 불분명한 때는 종종 찾아온다. 과도한 기대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사례도 있다. 한 아버지는 5세 아들이 “놀이터에 나가서 놀고 싶다”고 하자 아들에게 손을 댔고, 아동학대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 아버지가 범행 때 했던 말은 “영어유치원을 다니면서 영어도 못한다. 공부 못하는 주제에 나가 놀면 안 된다”였다.

2012년에는 브로커를 통해 과테말라 등의 위조 여권을 만들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입학시킨 이들이 대거 기소됐었다. 법원은 “부유층의 범행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그러면서도 “자녀에게 좀더 나은 교육기회를 주려는 부모의 본성에서 기인했다” “많은 사람이 자녀를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영어유치원 등에 공공연히 퍼져 이를 듣고 하게 된 것”이란 점을 양형에 참작했다.

전직 영어유치원 교사인 한 40대는 “영어학원에 뿌린 돈의 10%만이라도 책을 사서 아이와 함께 읽고 소통한다면 그게 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건 자유겠지만, 부모님들이 아셔야 할 것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정진영 박장군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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