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특권 의식이 만들어낸 ‘현수막 공해’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특권 의식이 만들어낸 ‘현수막 공해’

입력 2023-03-17 04:20 수정 2023-03-17 06:40

깡패·매국노·감옥·탄핵…
거리마다 시선 괴롭히는
저질 정치의 현수막 횡포

법제처·행안부·선관위 의견
죄다 묵살한 국회의원들의
옥외광고물법 개정서 비롯

정당의 ‘특별한 지위’ 주장한
그들의 특권 의식이
우리에게 그 한심한 문구를
매일 읽도록 강요하고 있다

2021년 9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경기도 의정부시 공무원 2명이 거리에서 현수막 6개를 철거했다. 불법 현수막이 걸렸다는 민원이 잇따라 빗속에 어렵게 작업했는데, 이들은 며칠 뒤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 현수막은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선거인단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고, 내걸었던 김민철 의원(의정부을) 측이 철거한 이들을 경찰에 고소한 터였다. 절도와 재물손괴 혐의로.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미신고 불법 게시물을 철거한 공무원이 도둑으로 몰린 사건에서 김 의원 측은 정당법이 정당의 홍보활동을 보장했는데 함부로 떼어냈다고 주장했다. 의정부시장도 민주당 소속이었으니 정파 간 다툼보다 정치와 행정의 충돌에 가까웠다. 정당법이 먼저냐, 옥외광고물법이 먼저냐. 경찰은 법제처에 유권해석을 청하며 긴 조사를 벌여야 했다(결국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김 의원 측은 “무분별한 단속에 경종을 울리려 고소장을 냈다”고 했는데, 국회에는 이미 경종을 넘어 단속을 일거에 무력화할 개정안이 세 건이나 제출돼 있었다. 민주당 김민철 서영교 김남국 의원이 차례로 발의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은 모두 제8조(적용 배제)에 ‘통상적 정당 활동’을 넣는 내용이었다. 미아 찾기나 교통사고 목격자 찾기 용도처럼 허가 없이 걸 수 있는 예외적 게시물에 정당 현수막을 포함시켰다.

행정안전부는 세 가지를 들어 반대했다. ①안전 ②난립 우려 ③일반 사업자와의 형평성. 세 차례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의 회의록은 무척 재미있다. 의원들이 어떤 논리로 ‘현수막을 내걸 자유’를 쟁취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의정부 ‘현수막 도난사건’ 두 달 뒤 열린 소위에서 김민철 의원이 행안부 차관에게 물었다.

“차관님, 정당 현수막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김민철 의원)

“정당이 광고주이고, 정당의 활동·주의·주장을 표현한….”(고규창 차관)

“저는 그 인식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헌법은 정당에 특별한 지위를 보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차관님은 그냥 광고주, 일반 사업자나 같은 개념으로 보시는 거잖아요.”(김민철)

정당의 ‘특별한 지위’는 세 차례 회의에서 의원들이 시종 강조한 논리였다.

“정당이 국민에게 알리는 건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단계인데, 옥외광고물법이 정당법과 상충돼요.”(박재호 의원)

“가장 중요한 정당의 활동을 알리는 걸 도시 미관이란 이유로 제지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까?”(김민철)

“현대 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정당 국가 시대라고요. 부작용이나 불편, 안전 문제는 부차적으로 제거해서 정당이 활동하게 보장해줘야죠.”(이명수 의원)

정당의 특별함을 앞세워 ③번 관문을 가볍게 넘어선 의원들은 시민의 안전과 불편을 ‘부차적 문제’로 규정하며 ①번도 돌파했다. 남은 것은 ②난립 우려. 2020년 9월 첫 소위에서 당시 이재영 행안부 차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정당이 44개입니다. 한 당이 하나씩만 걸어도… 위원님, 죄송합니다만 하나씩 허용하면 정말 하나만 걸까요? 지금 허용하지 않는데도 여러 개 거는데.” 의원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매일 거는 건 아니니까.”(박재호)

“온 동네에 도배하겠다는 취지도 아니고.”(김형동)

“잘 보이는 곳에 하나씩 걸면 도시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습니다.”(김민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자체가 지정하는 게시대에 정당 현수막을 거는 대안을 권고했다. 정당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옥외광고물의 난립을 막도록. 의원들은 마뜩잖아 했다.

“지정게시대가 어디 있냐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요… 그리고 다른 현수막이 계속 있으면 그걸 뗄 때까지 우리가 기다려야 해요.”(김민철)

놀랍게도 반대하는 의원이 있었다. “정치인만 자유롭게 현수막을 게재한다면 과연 국민이 납득할까요?”(이형석 민주당 의원) 이런 목소리는 다수의 성화에 묻혀버렸다. 세 개정안은 가장 급진적인 김남국안(案)에 가깝게 병합돼 아무데나, 얼마든지 걸 수 있게 통과됐다. 정당 현수막도 옥외광고물법 규제 대상이라는 법제처 유권해석과 행안부 반대, 선관위 권고는 다 묵살됐다.

정치의 특권 의식에서 비롯된 그 결과물을 요즘 우리는 매일 보고 있다. 쌍욕에 가까운 저질 현수막이 거리를 도배했다. 쾌적할 권리를 짓밟힌 시민들은 그 한심한 문구를 아침저녁 읽도록 강요당하는 중이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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