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원응두 (10) 예래교회 섬기며 예배 인도… 교회 학교 부흥에 집중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원응두 (10) 예래교회 섬기며 예배 인도… 교회 학교 부흥에 집중

경제적 자립이 힘든 옆 동네 ‘예래교회’
예배 인도할 교역자 모실 형편 안 돼
예래교회 당회장 권유로 교회 맡게 돼

입력 2023-03-2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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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응두 원로장로가 한때 섬겼던 예래교회는 없어지고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내가 중문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던 때에 이웃 동네에 있는 교회를 섬긴 적이 있다. 예래라는 마을의 교회였다. 예래는 중문 옆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예래교회는 자그마했다. 동네는 규모가 있었지만 교인이 많지 않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예래교회는 교역자를 따로 모실 형편이 안 돼 중문교회에서 장로들이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인도하기로 했다. 그때 예래교회 당회장을 겸하고 있던 서귀포제일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교회를 맡아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 그저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교회를 섬기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봉사를 하겠다는 결심이 서 승낙했다.

중문 집에서 예래교회까지는 약 5㎞ 정도 된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건천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문제가 없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사람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넘치는 곳이다. 장마철엔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은 5㎞를 우회해서 예래교회로 가곤 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마을엔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걸어서 마을로 가야 했다. 어떤 때는 새벽에 가기도 하고 한밤중에 가는 일도 있었다.

교회의 교세는 약해서 장년 성도는 남자 5명, 여자 10명 정도였다. 주일학교는 30명 정도 아이들이 있었고 중등부는 10명 정도 학생들이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30평 정도의 석조 건물이었고 사택도 15평 정도 됐다. 그런대로 모양은 갖춘 교회였다. 대부분 작은 시골교회들이 그랬듯 재정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나는 감사하게도 약간의 사례비를 받곤 했다.

예래교회는 1947년 세워진 교회다. 이 교회는 경찰관인 김두혁이라는 분이 초등학교 교사인 정영기라는 분과 함께 예래 마을 청년들을 전도하며 세웠다. 김두혁은 경찰 관직을 마치면서 전도사가 되어 예래교회를 이끌어 왔고 그런 애씀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해 석조 건물 교회당까지 건축했다.

그러나 전도사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다시 어려워졌고 곧바로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는 과정에서 중문교회 오공화 장로님께서 열심히 예래교회를 도왔다. 이후 다시 전도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운영해왔지만 쉽게 부흥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봉사하게 된 것이다. 감사하게도 교회는 약간씩 회복되었고 부흥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교회학교에 집중해 기도하면서 교회를 이끌었다.

학생들은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 생활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 학생들 부모님들은 대개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들은 나중에 교회의 주역이 됐다. 학생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냈다. 그때 학생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모습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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