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계집’을 위한 변명

국민일보

[청사초롱] ‘계집’을 위한 변명

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입력 2023-03-22 04:02 수정 2023-03-22 04:02

남(男)은 ‘사내 남’, 여(女)는 ‘계집 녀’. 조선시대 천자문에 나오는 ‘남녀’의 뜻풀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도 이렇게 배웠을 것이다. 요즘 어린이용 한자 교재는 다르다. ‘남자 남’과 ‘여자 녀’로 돼 있다. 사내와 계집이라는 전통적 뜻풀이를 고수한 교재는 드물다.

엄밀히 말해 ‘남자 남’과 ‘여자 녀’는 개념을 설명하는 정의문으로는 빵점이다. 정의문은 정의 대상이 되는 개념(피정의항)과 그 개념에 대한 설명(정의항)으로 구성된다. 정의항과 피정의항은 단어의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요컨대 ‘남자 남’과 ‘여자 녀’는 ‘남자는 남자다’ ‘여자는 여자다’처럼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동어반복을 피하려면 ‘하늘 천’ ‘땅 지’처럼 피정의항은 한자, 정의항은 우리말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사내와 계집이라는 우리말을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말 호칭은 상대에 따라 세 가지로 달라진다. 높이면 존칭, 낮추면 비칭,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으면 평칭이다. 오늘날 사내는 평칭, 계집은 비칭으로 쓰인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내는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의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냥 젊은 남자라는 뜻이다. 반면 계집은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비하 의도가 뚜렷하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쓰인다. “너희 아버지 진짜 사나이더라”라고 하면 칭찬이다. “맞아, 우리 아버지 상남자야”라고 맞장구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희 어머니 천상 계집이더라”라고 하면 멱살잡이가 벌어질 것이다. “우리 엄마한테 계집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지금은 계집이 비칭이지만, 원래는 여자를 뜻하는 우리말로 비칭이 아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중세국어에서 사내와 계집은 평칭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 한글 문헌에서 손윗사람을 사내나 계집으로 호칭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계집은 남성이 여성 손아랫사람을 가리키거나 여성이 자신을 낮출 때나 사용한 표현이다. 계집은 옛날부터 비칭이었다. 남녀가 평등한 오늘날, 남자는 사내라는 평칭으로 부르면서 여자만 계집이라는 비칭으로 부를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사내 남’과 ‘계집 녀’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남자 남’ ‘여자 녀’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여(女)를 ‘계집 녀’라고 풀이한 이유는 여성 혐오인가? 그건 또 아니다. 남녀는 남자와 여자라는 뜻도 있지만 아들과 딸이라는 뜻도 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는 남자가 둘이고 여자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아들이 둘이고 딸이 하나라는 뜻이다. 아들이 남자고 딸이 여자이긴 하지만 남녀와 아들딸은 애당초 다른 개념이다.

남의 아들과 딸은 ‘아드님’ ‘따님’ ‘영윤’ ‘영애’ 따위로 높여 부르고, 자기 아들과 딸은 낮춰 부르는 것이 우리의 언어 관습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애는 몇이나 있냐?”라고 물어보면 “사내놈만 둘이야” “계집애 하나뿐이야”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계집은 자기 딸을 낮춰 부르는 관습적 표현에 불과하다. 여성들도 친한 사이에는 종종 쓴다. ‘이 지지배가.’ 이 역시 관습적 표현이다. 물론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다.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사용 가능한 호칭이다.

이제는 아버지조차 딸을 계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쩌다보니 사내는 평칭으로, 계집은 비칭으로 자리 잡았다. 언어의 주인은 언중이다. 이미 비칭으로 굳어진 계집을 평칭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사내 남’과 ‘계집 녀’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그렇다고 동어반복에 불과한 ‘남자 남’과 ‘여자 녀’도 이상하다. 차라리 ‘아들 남’과 ‘딸 녀’가 낫겠다.

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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