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아가동산’의 김기순

국민일보

[창] ‘아가동산’의 김기순

입력 2023-03-25 04:08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공개된 이후 지속적으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있다. 그 공론의 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여신도들을 장기간 악랄한 방법으로 성착취한 JMS 정명석이다. 피해자 메이플의 폭로로 드러난 정명석의 악행은 ‘나는 신이다’를 통해 더욱 많은 이에게 알려졌고,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 역시 정명석과 그의 조력자들에 대한 엄정한 수사에 나섰다.

‘나는 신이다’에 등장한 사이비 교주 네 명의 악행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기괴하다. 정명석은 징역 10년을 복역한 뒤 똑같은 수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이 더욱 공분을 사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아가동산’의 김기순에 관한 이야기가 정명석만큼이나, 오히려 그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신이다’의 감독 조성현 PD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정명석에 대해서만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과 관련해 “‘아가동산’의 경우에는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이 조만간 들어올 것 같아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다”며 김기순을 다룬 회차를 반드시 봐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남성 신도들을 상대로 한 변태적인 성착취,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까지 받는 김기순 에피소드에 대한 주목도는 그의 범행 정도에 비해 낮은 편이다. 정명석의 범행이 현재진행형인 것과 달리 김기순의 범행은 대략 30여년 전의 이야기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김기순의 범행은 이미 1997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사안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초반 회차인 1∼3회차에 정명석이 등장하고, 그보다 후반부인 5, 6회차에 김기순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 또한 시청자들의 관심도를 낮추는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기순은 1982년부터 경기도 이천군 일대의 땅 4000평을 구입해 ‘아가 농장’을 만들며 그 안에서 ‘아가동산’이라는 종교를 세웠다. 본인을 3살 ‘아가’라고 표현하며 교주를 자처했고, 그 안 신도들의 노동을 착취해 번 돈으로 신나라레코드를 설립한 뒤 돈을 쓸어 담는다. 협업농장이라는 허울 아래 신도들은 18시간에 달하는 노동시간을 버텨내야 했고, 그 돈은 고스란히 김기순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김기순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7년에는 7세의 아동 신도 최낙귀(가명)군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며 8월 찜통더위에 돼지 똥을 먹였다. 2~3일을 돼지우리에 가둔 채 매질을 했다. 결국 최군은 사망했다. 수사기관에서 최군의 모친은 “낙귀가 맞아 죽었다”고 진술했지만 법정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매질에 가담했던 이들이 폭행으로 사망한 것이라는 진술을 했지만 최군 모친이 무죄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김기순의 아들이 좋아했던 여성 신도 강미경 또한 폭행당해 사망했다는 진술이 여럿 나왔다. 사체를 유기한 과수원 책임자 윤방수도 본인의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사체는 찾을 수 없었고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 역시 무죄로 판결이 났다. 김기순을 당시 법정에 세웠던 강민구 전 검사(변호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관련법의 한계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당시 법원은 최군의 사망을 인정하면서도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봤다.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가 인정된다고 봤지만 이 또한 공소시효(7년)가 지나 무죄가 됐다. 강미경 사건 역시 폭행과 사체유기에 가담했다고 진술한 이들은 10여명에 달했지만 명백한 증거, 즉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가 됐다.

강 전 검사는 법정에서 “포항제철에서 쇳물에 누군가를 밀어 넣었는데 사체가 사라지면 그 사건은 무죄냐”며 재판부를 향해 유죄 선고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결국 김기순에 대해서는 징역 4년과 벌금 56억원만 선고됐다. 조세포탈과 횡령 혐의 등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된 것이다. 그마저도 보석금 1억원을 내고 석방됐다.

올해 83세인 김기순은 아직도 대형음반사 신나라레코드의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10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피해자는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게 수사의 대원칙이기는 하나 김기순이 여전히 어딘가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을 거란 사실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김기순이야말로 무죄추정·증거주의 원칙의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 아닐까.


이가현 사회부 기자 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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