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766대 0, 법은 시민 편이 아니었다

국민일보

[국민논단] 766대 0, 법은 시민 편이 아니었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입력 2023-03-27 04:02

무서운 속도로 다른 차와 충돌하고 지하통로에 추락하는 순간까지 운전석의 할머니는 동승한 손자를 애타게 불렀다. 작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급발진 의심사고로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입건돼 조사를 받고 있다. 자식을 잃고 어머니마저 처벌당할 처지에 놓인 아들은 “어머니는 죄가 없다”며 운전자 스스로 과실이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 법의 개정을 국회에 청원했다. 지난 13년간 교통안전공단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신고는 766건인데, 그중 인정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실제로 119에 급발진 사고로 신고한 사례는 훨씬 더 많지만 현행 법체계에서는 백전백패일 뿐이다.

2012년 미국 의회는 도요타 캠리 모델의 급발진 조사를 항공우주국(NASA)에 의뢰했지만 원인 규명에 실패하자 민간 소프트웨어 컨설팅업체 바(BARR) 그룹에 재조사를 요청했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전자제어장치(ECU)의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생겼을 때, 안전장치(Fail Safes)가 작동하지 않으면 엔진제어시스템(ETCS)에 잘못된 명령이 내려져 급발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재현했다. 2013년 오클라호마주 법원에서 이를 인용해 손해배상금 3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배심원 평결이 나오자 도요타는 바로 손해배상에 합의했다. 2007년 발생한 급발진 사건 소송은 그렇게 6년 만에 끝났다. 도요타는 다른 급발진 소송 400여건 중 338건도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2014년 미 법무부는 도요타에 벌금 12억 달러를 부과하고, 4년 동안 진행된 도요타의 급발진 문제 은폐 관련 수사를 기소유예로 종결했다. 제조사에 입증 책임이 있는 강력한 소비자보호법이 있었지만 급발진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미 의회와 정부가 직접 나섰던 것이다.

이에 비해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사고가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 운전자가 사고 원인을 입증해야 하는 법체계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사고 조사는 기록장치(EDR)를 복기하는 데 머물러 있다. 그것만으로는 운전자가 급가속한 것인지, 소프트웨어 결함에 의한 오작동인지 판별할 수 없지만 모두 운전자 책임으로 결론이 났다. 그 결과가 766대 0이다. 법도 정부도 시민 편은 아니었다.

이미 10여년 전인 18대 국회 때 급발진 사고와 의료사고 관련 입증 책임 전환에 관한 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둘의 공통점은 정보의 비대칭성에 있다. 자동차나 의료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고 실질적인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데 피해자가 사고 원인을 입증하도록 돼 있는 법은 부담만 더하는 상황이었다. 급발진 사고 법 개정안은 기업에 과도한 책임을 지운다는 반대에 막혀 폐기됐지만, 의료사고에 관해서는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입증 책임의 부분적 전환이 이뤄졌다. 2012년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만들어졌고, 피해자들은 평균 28.3개월이 걸리던 의료사고 소송 대신 90일(최대 120일) 이내에 의료분쟁 조정 중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길은 분명하다. NASA도 못 밝혀낸 급발진 사고 원인을 소프트웨어 회사가 찾아낸 것은 미 의회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미 정부가 도요타를 4년간이나 수사한 이유도 개개인에게 맡겨놓아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최근 미 정부는 불과 10여대의 테슬라 차량이 오토파일럿 작동 중 충돌 사고를 내자 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이미 재작년부터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 기능 결함을 조사해 왔고, 지난 2월 차량 36만여대에 리콜 명령을 내렸다. 자유시장주의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해 조사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의 당사자가 되는 일은 빈번하다. 자유로운 시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인 시민의 안전과 권리가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야와 정부가 모처럼 한목소리로 급발진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해묵은 숙제에 답을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도요타나 테슬라 사례에서 보듯 이제 자동차의 결함은 소프트웨어 영역의 문제다. 고도의 전자기기로 구현되는 자율주행 자동차 시대에 소프트웨어 오작동 여부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 정부가 발 빠르게 테슬라 조사에 나선 이유도, 우리 국회와 정부가 법 개정과 함께 직접 조사에 나서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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