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힘내라, 문과

국민일보

[가리사니] 힘내라, 문과

전성필 산업1부 기자

입력 2023-03-27 04:06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둘러싼 전례 없는 속도전이 연일 이어지자 문과생들의 ‘설움’와 ‘소외’는 극한에 치달았다. 인류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개발자 등 이공계생들인 것처럼 여겨지면서다. 오늘 나온 AI가 내일은 ‘구버전’으로 전락하는 게 현실인데, 문과생들은 뒤늦게 AI 관련 개념을 습득하고 이해하느라 바쁘다. 거대한 흐름을 타지 못하고 저 멀리 밀려나는 자신을 발견하곤 ‘문송합니다’를 외친다.

다행히 문과생이 웃는 시간도 다가오는 중이다. 윤송이 엔씨소프트 사장은 지난 1월 한 포럼에서 “개발자들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게임 내 영웅의 성별을 반반으로 맞추자고 개발자들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개발자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응했다. 게임의 주 이용자는 대부분 남성이다. 개발자도 주로 남성이다. ‘게임의 주인공은 당연히 남성’이라는 편견이 작용했고, 많은 게임 속 영웅은 남성으로 통일됐다. 젠더 쏠림을 완화하자는 윤리적 외침은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윤 사장은 “개발자들의 편견이 담긴 AI가 지난 100여년 동안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며 쟁취한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뒤처지면 그대로 패배한다는 극한의 경쟁의식이 지배하는 AI 생태계 속에서 개발자들이 인문학을 공부할 여유를 갖기란 어렵다. 이 때문에 최근 IT업계에서는 기업 내 개발자들이 기술의 구현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AI의 윤리적 실수’에 대처하지 못하는 사태가 우후죽순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대부분의 개발자는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서비스로 상용화할 수 있을지 사업성을 따진다고 한다. AI를 어떤 서비스에 접목할 수 있을지, 서비스화한다면 어떻게 수익을 낼지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셈이다.

기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지, 서비스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진 않을지 등의 맥락은 사후 검증의 영역에 남긴다. IT업계에 다니는 한 경영진은 “프로그램 버그를 찾아내 사후 수정하듯이 서비스를 우선 출시하고 이후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그제야 대처하면 된다는 식으로 사업을 하는 IT 기업들이 점점 늘고 있다. 적절한 기준도 없이 ‘고삐 풀린 말’처럼 AI 서비스가 난립하는 중”이라고 우려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AI 서비스는 시장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게 현실이다. 빅테크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16년 챗봇 ‘테이’를 내놨었다. 챗GPT의 전신인데, 여성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콘텐츠를 쏟아냈다. 사회적 비판이 들끓었고, 곧바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내에서는 AI 챗봇 이루다가 장애인·여성 등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혐오 발언을 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많은 비판 속에 이루다는 서비스를 접어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AI 윤리성에 대한 고찰을 반영한 2.0 버전을 내놓을 수 있었다. 챗GPT 역시 그럴듯한 말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비윤리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 ‘환각 현상’ 때문에 AI 윤리를 시급하게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윤리적·사회적 올바름의 맥락을 읽을 줄 아는 문과생들이 역할을 할 절호의 시기다. IT 기업들은 문과생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만 사업적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병원에 의사뿐만 아니라 생명 윤리나 철학을 전공한 이들이 윤리위원회에 들어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발자들이 생성형 AI 고도화에 속도를 낼수록 ‘문과생의 시대’는 더 빛날 수 있다. 생성형 AI 덕에 문과생과 개발자 간 기술적 격차는 거의 없을 정도로 좁혀졌다. 코딩 능력이나 IT 활용 능력이 없더라도 ‘말 한마디’만 잘하면 얼마든지 좋은 소프트웨어를 찍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인간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윤리적 문제가 없는 서비스는 시장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 이공계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문과생이 승리자로 설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힘내라, 문과생이여.

전성필 산업1부 기자 feel@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