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국민일보

[혜윰노트]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입력 2023-03-31 04:02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살아가는 가수 요조는 주위에서 걱정을 듣는다고 한다. 장거리를 다니는 일상에서 체력이나 정신력에 균열이 생기지는 않는지에 대한 걱정이다. 이에 대해 요조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란 글로 답했다. 공항에서 매번 어떤 기운을 느낀다는 고백이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저장돼 있는 유언장을 읽거나 수정한다고 했다. 이 비행이 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지면에 닿지 않은 비행기는 위험하다고 느끼기에 땅에 발이 닿아야 비로소 살아남았다고 안도한다고. 죽을 뻔했던 사람이 살았으니, 이건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아니겠냐는 메시지였다. 살았다는 ‘은은한 희열’에 피곤도 잊고 감사를 느낀다는 글을, 봄 여행을 통해 나는 체감했다.

오랜만에 여행을 위해 연이어 비행기를 탔다. 이탈리아의 몇 개 도시와 일본의 가나자와 여행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시기를 겪은 후 떠난 터라서 감회가 특별했다.

여행길에서는 모든 게 새로웠다. 안달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기차 시간을 놓쳐 다음 기차를 타게 돼도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할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목적지를 몇 개 정해뒀으나 갈 수 없다 해도 마음이 허전하지 않았다. 먹고 걷고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져 자책이라는 감정이 사라진 상태로 몇 날을 보낼 수 있었다. 요조가 비행을 통해 새로이 태어나는 느낌을 맛보았다면, 나는 여행지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신선한 기분을 유지했다.

여행 떠나기 전후에 책을 읽는다. 떠나기 전에는 주로 해당 도시의 역사나 정보를 잘 알기 위해 실용서를 들췄다. 돌아와서는 여행자의 문화를 사유하는 인문서를 읽었다. 읽는 책들은 여행의 여운을 짙게 만들었다.

“연간 5백만명이 찾아오는 바티칸 방문 최고의 하이라이트, 여기는 바티칸 내의 작은 성당인 시스티나 성당입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사람들. 너나없이 숭고미에 압도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성서 창세기의 주요 사건을 재현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손을 통해 하느님이 아담에게 영혼을 전하는 순간을 포착하지요. 손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특별한 어떤 것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아담은 잠에서 막 깨어난 눈빛으로 손가락을 뻗어 신의 손가락과 접촉을 시도하지 않습니까. 손은 ‘창조의 주체’에서 ‘소통의 주체’로 거듭납니다.”

국문학자 윤재웅 교수가 쓴 ‘유럽 인문 산책’의 이탈리아 챕터는 내가 들렀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환기했다. 고요한 공간의 무게 덕분에 성스러움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할 수 있었던 곳.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대화도 가능하지 않다. 그곳에서는 누구라도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후 이탈리아 도시의 성당을 들를 때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떠올리게 됐다.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서 소통이란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순간의 인간은 신성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일본 소도시 가나자와에는 생긴 지 1년이 안 된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의 장엄미는 나를 놀라게 했다. 기존 도서관의 통념을 깨고 싶었다는 건축가는 4층까지 뚫린 천장과 30만권이 꽂힌 원형 서가를 배치, ‘북(book)콜로세움’이라 불리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책 분류도 새로웠다. 오래 머물며 우연히 자신의 책을 만나라는 콘셉트로 만든 도서관에서 책 장르에 대한 편견이 깨어져나가는 걸 느꼈다. 시스티나 성당에서처럼 목을 꺾어 도서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책을 쓰고 만들고 읽는 인간들의 세계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읽고 이해하며 어제의 비좁은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난다. 여행길에서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실하고 고마운 느낌을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이 기분을 ‘다시 태어남’이라고 이름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책과 여행을 통해 계속 다시 태어나고 싶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