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밤 밝히는 편의점, 지원이 필요하다

국민일보

[여의춘추] 밤 밝히는 편의점, 지원이 필요하다

송세영 편집국 부국장

입력 2023-04-04 04:08 수정 2023-04-04 04:08

199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한겨울 서울 대학로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막차를 놓쳤다. 주머니엔 택시를 탈 돈이 없었다. 서너 시간 걸어서라도 집에 가볼까 했지만 한밤중에 한강 다리를 건너는 게 내키지 않았다. 유흥주점은 물론이고 음식점이나 만화방 같은 곳도 밤 12시 이후 심야영업이 금지된 시절이었다. 밤거리를 10여분 헤맸지만 눈에 들어온 건 편의점뿐이었다. 다행히 의자와 테이블도 있는 곳이어서 따끈한 컵라면 국물로 추위를 달래며 밤을 새웠다. 편의점은 다국적 대기업 자본의 첨병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조금은 바뀐 날이었다.

지금 사는 곳 근처 오피스텔 1층에 큰 편의점이 있다. 낡았지만 단정한 차림새의 백발 할머니 한 분이 새벽 5시쯤 조용히 들어와 컵라면을 산다. 찬밥과 김치를 가져와선 먹어도 되냐고 정중하게 허락을 구한 뒤 혼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면서 이른 아침식사를 한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무척 외롭고 쓸쓸한 장면이었다고, 그곳 아르바이트 학생이 이야기해줬다. 하루는 계란을 한 알 가져왔는데 오해를 받을까 걱정됐는지 집에서 가져온 거라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해 더 안쓰러웠다고 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편의점에 얽힌 추억이나 이야기 한두 개쯤은 갖고 있을 듯싶다. 24시간 365일 일상을 함께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국내 편의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9년 5월 세븐일레븐 올림픽선수촌점 개점이었다. 34년이 지난 오늘날 전국 편의점 수는 5만개를 넘어섰다. 인구 1000명당 1개꼴이니 대단한 규모다.

편의점은 간단한 취식도 가능한, 깔끔한 인테리어의 소매점으로 출발했지만 공공요금 수납, 현금지급기, 택배 수납, 세탁, 상비약 판매 등 생활편의 서비스를 확대해왔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취식이 제한됐던 일부 시기를 제외하곤 도시락 등 간편식 제품 소비가 늘면서 인기가 식지 않았다. 주로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에 있기 때문에 밤거리를 걷는 이들에겐 안심 등대 역할도 한다.

최근 본사에서 부과하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심야영업을 중단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야간 유동인구가 회복되지 않아 매출이 줄어든 데다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건비 부담은 커졌기 때문이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밤 근무는 낮보다 체력적으로 힘들고 건강에도 무리가 간다. 혼자 근무하는 특성으로 인해 범죄에 노출되기도 쉽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편의점에서 발생한 범죄 건수는 2019년 1만4355건, 2020년 1만4697건, 2021년 1만5489건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편의점 가맹점주 단체인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는 지난해 7월 심야시간대에 편의점 상품 가격을 5% 올려 받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고물가 상황에서 서민들의 부담을 늘리는 건 여의치 않다. 담배광고를 가리기 위해 외부 유리벽에 부착해야 하는 불투명 시트지가 근무자의 안전을 위협한다며 없애 달라는 요구도 나왔다. 하지만 국민보건을 위한 규정과 상충해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심야시간 편의점의 불은 하나둘 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밤거리는 더 어두워지고 인적은 뜸해진다. 밤에 고열이나 두통에 시달려도 진통제나 해열제를 구하기가 어려워진다. 밤늦게 일하거나 공부하는 이들이 끼니나 간식거리를 해결할 곳도 마땅치 않게 된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야간에도 자유롭게 외출이 가능한 안전한 환경을 매력 중 하나로 꼽는다. 24시간 편의점이 여기에 상당한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편의점은 밤을 밝힘으로써 치안과 보건, 생활편의에서 나아가 관광객 유치까지 다양한 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심야영업의 애로를 호소하는 목소리를 특정 업주들의 민원으로만 보지 말고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하면 좋겠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국민 보건을 위해 공공 심야약국을 지정해 지원하는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편의점의 경우 야간근무자의 인건비를 일부 지원하고 경찰과 협력해 범죄예방 시스템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지원받는 만큼 공적인 역할을 더 수행하도록 주문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자체가 앞장서고 중앙정부가 힘을 보태면 민관협력의 공공 안전·보건·생활편의 네트워크를 24시간 가동할 수 있다.

송세영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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