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주제’ 기후·여성·탈식민… 새로운 담론은 없었다

국민일보

‘단골주제’ 기후·여성·탈식민… 새로운 담론은 없었다

94일간 펼쳐지는 ‘현대미술 향연’ 광주 비엔날레 르포

입력 2023-04-11 20:10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를 기치로 내건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6일 94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메인전시장인 비엔날레관에 엄정순 작가가 시각장애학생들과 협업한 작품 ‘코 없는 코끼리’가 전시돼 있다. 박서보예술상 수상작이다.

카페와 기념품 가게로 사용되던 비엔날레 전시장 출구가 이번 행사에서는 거꾸로 입구가 됐다. 바닥에 깔린 흙에서 자연의 냄새가 훅 끼친다. 좀 더 들어가니 바닥에 수조가 있고 수조 물을 스크린 삼아 영상이 비친다. 남아공 흑인 여성 작가 불루베즈웨 시와니가 여성 치유사 전수 훈련을 받은 개인적 기억과 경험을 퍼포먼스로 풀어내고 이를 영상에 담은 작품이 올해 비엔날레의 전시 길잡이가 됐다.

남아공 여성 작가 불루베즈웨 시와니의 퍼포먼스 영상작품.

아시아 최대 현대미술 제전인 제14회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6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7월 9일까지 94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이숙경 예술감독이 노자의 도덕경에서 차용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란 주제로 초청한 32개국 70여명의 작가의 작품이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국립광주박물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무각사, 아트스페이스 하우스 등 5곳에서 펼쳐진다. 시와니의 작품이 시사하듯 생태, 여성, 탈식민주의, 기후위기 등 인류가 당면한 이슈를 제기하며 연대와 사유, 성찰의 메시지를 던지는 올해 비엔날레 현장을 지난 5∼6일 프레스투어 때 다녀왔다.

2020년 이후 미술계 담론 되풀이

로마계 폴란드 작가 마우고르자타 미르가-타스가 로마의 공동체 문화를 천으로 이미지화한 작품 등 비엔날레 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전시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며 아마추어 출신의 작품은 물론 장애인 예술도 등장시켰다. 서양화가 엄정순은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만든 코끼리를 대형화한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잘 보이지 않는 그들이 후각과 촉각에 기대 만든 코끼리는 코가 없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는 이 설치 작품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 없는 세상을 촉구한다. 폴란드 자코파네 태생의 마우고르자타 미르가-타스는 로마계 베르깃타족 출신인데, 로마의 공동체 문화를 지인들이 기증한 옷감을 사용해 패치워크처럼 이미지화했다.

제국주의에 의해 해체된 도예, 직물 등 전통적 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들의 작품도 나와 2부 ‘조상의 목소리’ 섹션에서 집중 소개됐다. 멕시코 모렐리아 태생의 노에 마르티네스는 선주민 문화를 반영한 도예 작품을 설치하고 현장에서 제의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멕시코 작가 노에 마르티네스가 선주민의 도예 전통을 살린 조각 작품 설치 현장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하지만 주제는 ‘역시나’였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도 코로나가 전 인류를 엄습한 2020년 이후 미술계를 사로잡은 담론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이탈리아의 베니스비엔날레는 물론 여름의 독일 카셀도쿠멘타, 가을의 부산비엔날레와 제주비엔날레까지 같은 주제를 다뤘다.

심지어 2년 전 데프네 아야스(터키)와 나타샤 진발레(인도)가 공동감독을 맡은 13회 광주비엔날레 역시 같은 주제를 다뤘다. 주제를 포장할 캐치프레이즈만 다를 뿐이다. 당시도 서구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된 제3세계 및 원주민의 전통을 살려내는 데 집중하며 자수, 카펫, 걸개, 매듭 등 전통 공예 형식이 다양하게 변주됐다. 2년 만에 다시 열린 이번 전시에서는 도예 작품이 강화된 게 눈에 띈다.

2년 전에는 전시 쓰레기를 의식해 허리 높이 정도의 목재 칸막이로 공간을 구분했다. 이번에는 가벽을 높이 세워 공간을 정확히 구획해 작품 하나하나가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구성을 취했다. 잘 만든 미술관 전시를 보는 듯해 영국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인 이숙경 감독의 전시 연출 능력이 충분히 발휘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비엔날레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비엔날레는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최전선이다. 새로운 담론이 없다면 형식이 새로워야 한다. 지난해 카셀도쿠멘타가 모델이다. 기후위기, 여성, 원주민 등 전 지구촌 담론을 되풀이했지만 형식에서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후줄근함’을 과감히 도입했고, 놀면서 감상할 수 있게 스케이드보드장을 전시장 한가운데 차려 호평과 혹평을 오가는 논란을 야기했다. 비엔날레에서 미술관에 들어선 듯 세련된 연출은 주제 자체의 생생한 목소리를 상쇄시키는 ‘부작용’도 있다.

전 세계 동시대 미술을 한 눈에

이강하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캐나다 파빌리온의 이누이트 예술 작품.

올해 돋보이는 것은 국가별 파빌리온의 활성화다. 파빌리온은 파리의 팔레 드 도쿄 등 해외 유수의 미술관, 대안공간 등에 광주비엔날레 기간 중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2018년 첫 해 3곳, 2021년 2곳에 이어 올해는 9개국이 참여했다. 캐나다 중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스위스 우크라이나 등 다양한 동시대 미술을 광주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강하미술관에서 하는 캐나다관은 ‘신화, 현실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캐나다 이누이트 예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누이트의 거주지인 킨케이트 지역 작가들의 협동조합 ‘웨스트 바핀’의 디렉터인 윌리엄 허프만이 큐레이터를 맡았다. 종이와 색연필이라는 아마추어적인 재료,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는 등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라는 주제 등이 코로나 시대를 성찰하게 한다. 양림미술관에서 하는 프랑스관은 지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특별언급상을 받은 지네브 세디라의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국가별 파빌리온 전시가 열리는 지역 박물관과 미술관을 순례하며 광주의 골목을 누비는 재미도 쏠쏠하다.

광주비엔날레가 올해 처음 제정한 박서보예술상은 엄정순씨에게 돌아갔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10만 달러(1억3000만원)와 황금비둘기 상패가 주어진다. 다만 원로 작가 박서보씨가 지난해 100만 달러(13억원)을 기탁하면서 제정된 이 상에 대해 광주예술계와 시민단체가 “박서보는 유신정권 관변미술계의 수장”이라며 폐지를 요구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광주=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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