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윤석열과 이재명의 1호 법안

국민일보

[여의춘추] 윤석열과 이재명의 1호 법안

고세욱 논설위원

입력 2023-04-21 04:08

윤석열 대통령의 노동개혁 1호 법안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이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생 1호 법안은 양곡관리법이다. 1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이들 법안은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공도 많이 들이고 애정을 담뿍 담아낸 작품이다. 예전 같으면 순조롭게 제도화되는 게 당연할 터. 하지만 두 법안 모두 용두사미 처지가 되거나 용도폐기 신세로 전락했다.

근로시간 개편안의 난맥상을 보자. 윤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현 주 52시간제 개정 의지가 남달랐다. 대선 기간 “게임 개발에 주 120시간 바짝 일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몰아서 일하고 푹 쉬자’는 기조는 선명했다. 공무원의 촉은 남다르기에 맞춤형 정책 개발이 진행됐다. 1년 가까이 준비했고 5개월간 전문가 기구의 자문을 받았다. 그런데 정부가 지난달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마자 사달이 났다.

윤 대통령은 우군으로 여긴 MZ세대 반발에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세대를 떠나 ‘많이 일한 뒤 제대로 쉬겠나’라는 의구심은 개편안이 간간이 알려질 때마다 제기됐다. 대통령이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윤 대통령은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다”며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는 듯 말했다. 대통령실과의 교감 없이 입법예고하는 간 큰 부처가 어디 있을까. 고용노동부의 홍보 미흡, 대응 부실을 탓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뱉기다.

입법예고 기간 마지막 날인 지난 17일,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두 달간 여론을 더 수렴하겠다고 했다. 질질 끄는 게 수상쩍던 차에 정치인 출신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다음 날 쉽게 설명했다. “주 69시간 노동제가 폐기될 수 있다.” 대통령실은 부인하지만 동력은 분명 상실됐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여러분이 불안해 하는 것을 이해한다. 일 못지 않게 휴식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를 확실히 마련하겠다. 국가 미래가 달린 만큼 나를 믿어달라”고 설득했으면 어땠을까. 1호 법안 당사자가 좌고우면하는데 힘이 실릴 리 없다.

근로시간 개편안이 대통령의 책임 회피로 만신창이가 됐다면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이 대표와 민주당의 무책임이 낳은 정쟁의 산물이다. 초과 생산된 쌀의 정부 의무 매입이 골자인 이 안을 이 대표는 “쌀값 정상화와 식량주권 보호법”이라 규정했다. 그 좋다는 법을 다수당인 민주당은 여당이던 문재인정부 시절 외면했다. 이전 정부에선 재정 걱정하다 이제는 식량주권 사수다. 2021년 기준 식량자급률은 쌀이 84.6%, 밀은 1.1%다. 식습관으로 쌀 소비 반등이 쉽지 않은 때에 어떤 작물을 전략적으로 지원할지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 거부권이 예고됐음에도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민생 1호로 들이밀었다. “일본산 멍게는 사줘도 한국 촌로들의 쌀은 못 사주겠다는 거냐”는 특유의 친일 프레임도 씌웠다. 어차피 책임은 대통령이 지고 여론도 불리할 것 없다는 정치적 속내가 뻔히 보인다. 대통령 거부권, 재투표 부결에 이르자 또 다른 후속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무책임 입법권의 무한 반복이다.

1호 법안들의 좌초는 우연, 불운에 의한 게 아니다. 초등학교 5세 입학안, 국가수사본부장 정순신씨 낙마에서도 대통령의 스타일은 변치 않았다. ‘실행 지시(5세 입학안)나 본심 표출(정순신 임명)을 해본다→여론(특히 MZ여론)이 악화되면 “민심을 살피라”고 격노한다→태세 전환한다.’ 이 대표도 초지일관이다. ‘진영의 관심 사항을 추린다(과거 반대한 것도 상관없다)→대통령과 여당 반발은 무시한다→수로 밀어붙인다→실패하면 대통령 책임으로 떠민다.’ 이런 패턴의 야당발 방송법과 노란봉투법이 국회에 대기 중이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무소신, 야당 대표의 무책임에 민생 법안의 설 자리는 없다.

선과 악으로 명백히 나뉜 법안은 없다. 근로시간이나 쌀 문제 모두 경제 선진화, 지방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여야정이 중지를 모았다면 방향을 잡고 여론을 설득할 수 있는 사안이다. 대통령부터 책임 의식을 갖고 반대 진영, 야당과도 소통하며 개혁 법안 통과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무한 책임 당사자가 대통령 아닌가. 집무실에 있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팻말의 의미를 되새길 때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하면 야당의 입법 전횡은 여론에 의해 막힐 것이다. 풍전등화에 놓인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2호, 3호 법안은 협치와 상생을 통해 세상에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