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폐허 위에 꽃핀 ‘천일화랑’을 아시나요

국민일보

전후 폐허 위에 꽃핀 ‘천일화랑’을 아시나요

日서 미술 공부한 이완석이 설립
한국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 소개
예화랑 ‘밤하늘의 별이 되어’전
천일화랑과 인연·이완석 조명

입력 2023-04-25 20:38
한국전쟁 후 천일화랑을 운영했던 산업미술가 이완석씨가 1960년대의 어느 날, 자신이 만든 포스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 광장시장 옆 천일백화점 4층에 1954년에 만든 천일화랑은 6개월 단명했지만 의미 있는 두 차례 전시로 미술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인성기념사업회 제공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지금의 서울 명동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 전신)에 ‘갤러리’가 들어섰다. 금박 액자에 씌운 유화 그림을 게다를 신고 하오리를 걸친 일본인 관람객이 구경하는 모습은 지금의 갤러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 강당이나 종교시설 등을 빌려서 열리던 전시회는 이처럼 1930년대 중반이 되면 미쓰코시, 화신, 조지아 등 백화점마다 들어 선 서양식 갤러리에서 상설화됐다. 갤러리는 일본을 통해 국내 수입된 서구 근대 문화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화랑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화신, 동화(지금의 신세계), 미도파 등 기존의 백화점 화랑은 지속적으로 운영됐다. 종전은 됐지만 전쟁이 할퀸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1954년 7월, 서울에 새로운 화랑 하나가 문을 열었다. 광장시장 옆 천일백화점 4층에 개점한 천일화랑이다. 이 백화점 지배인 이완석(1915∼1969)이 기업주를 설득해 문을 연 것이다.

이완석은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로 유학 가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1937년에 귀국한 이완석은 ‘조고약’으로 유명했던 천일제약에 취직해 디자인 업무를 했다. 천일제약 창업주인 한의사 조근창의 아들과 일본에서 같이 유학하며 절친하게 지낸 인연이 작용했다. 나중에 천일제약이 천일백화점을 차려 업종 다변화를 하자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이완석이 지배인을 맡았던 것이다.

7월 개관전에는 총 4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동양화 부문에 고희동 김은호 이상범 이응로 등이, 서양화 부문에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도상봉 이마동 등이 포함됐다. 조각 부문에 윤효중 김경승이 참여했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라 이완석의 안목과 인맥을 짐작할 수 있다.

'유작 3인전'에 나온 이인성 작 '한정'을 아들 이채원이 보고 있는 모습. 이인성기념사업회 제공

이어 9월에는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 3인 유작전이 열렸다. 이들 세 명은 한국전쟁 중에 각각 52세, 47세, 38세로 이른 죽음을 맞은 공통점이 있다. 해방 정부가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벤치마킹해 1949년에 시작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중량감이 컸기에 대한미협이 1954년 추모 전시를 기획하며 전시 장소로 천일화랑을 택한 것이었다. 유작전에는 세 작가의 40점이 나왔다. 개막일엔 백화점 옥상에서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열렸다.

이완석씨가 제작한 '유작 3인전' 포스터. 예화랑 제공

미술기자 이구열이 천일화랑의 존재 의의에 대해 “6·25 전란 직후 서울에서의 첫 영업화랑의 등장”이라며 “참혹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던 가까운 친구를 포함한 여러 미술가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을 베풀고자 자신의 백화점 지배인 위치를 활용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기존의 화신, 동화 미도파 등 백화점 화랑이 장소 임대만 했던 것과 달리 천일화랑은 기획전을 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천일화랑은 지금의 백화점 문화센터처럼 미술강좌도 열었다. 이구열은 “백화점 고객에게 가난한 미술가 친구들의 작품을 적극 팔아주기 위해서는 고객들에게 미술교양의 기회와 환경 조성이 긴요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의욕에도 불구하고 천일화랑은 6개월 뒤 문을 닫았다. 종전 후 1년여 만에 생긴 화랑이니 존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화가 정규는 “종로 4가는 장사를 하는 곳이지 전람회를 할 지역은 못되는 곳이라면 실언이 될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김환기는 55년 잡지 ‘새벽’에 “화가가 그림을 들고 나가 어디다 내걸고 전람회를 하란 말인가”라며 개탄했지만 1950·60년대는 한국미술시장사에서 화랑의 불모지였다. 그러던 것이 산업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 들어 명동화랑, 현대화랑, 예화랑 등이 생겨나며 화랑의 역사에도 마침내 봄이 오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예화랑은 45주년 기념전 ‘밤하늘의 별이 되어’를 통해 천일화랑과 이완석을 조명한다. 예화랑은 이완석의 딸 이숙영이 1978년 인사동에 문을 열었고 이숙영 사후 딸 김방은씨가 201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현재 자리로는 1982년에 이전했다.

김방은 대표는 “예화랑의 뿌리가 어디서 왔나를 찾다가 천일화랑의 역사를 알게 됐다”며 가족적인 인연을 넘어 한국현대미술사의 초기를 함께 했던 작가들의 작가 정신을 조명하고 싶은 마음에서 전시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오지호의 유화 '북구의 봄'(1981). 예화랑 제공

천일화랑이 중개상으로 열정을 보였던 것처럼 전후의 척박한 현실에도 꿋꿋이 캔버스와 물감을 버리지 않았던 근대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볼 수 있다.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김향안 유영국 장욱진 이대원 문신 천경자 변종하 등 작가 21명의 작품 50여점이 나왔다.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인성의 색다른 작품, 말년의 격동적인 필치로 보라색의 세계를 일군 오지호의 작품, 유학파 화가의 데생력을 보여주는 구본웅의 데생 등 흥미로운 작품이 적지 않다.

구본웅의 연필 데생(1930년대 추정). 예화랑 제공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은 한국 1세대 산업 디자이너 이완석을 조명하는 것이다. 그가 만든 천일제약 광고와 포장 뿐 아니라 산업포스터 등을 통해 디자인이 관광 산업에 복무했던 개발연대 시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자료는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고 그해 11월에는 이완석을 포함해 국내 산업디자인의 뿌리를 찾는 ‘모던 데자인: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전이 열렸다.

이완석씨가 제작한 산업 포스터. 예화랑 제공

이번 전시는 아울러 공예운동가 이완석의 삶도 살펴본다. 이완석은 천일화랑이 문 닫은지 10년 후인 1964년 그는 화랑 자리에 한국민예품연구소를 차렸다. 연구소는 토속적인 각종 민예품과 그 복제품의 수집, 제작 판매 센터였다. 이완석은 196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54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연구소를 운영했다. 생전 조선미술가협회, 대한미술협회, 조선공예가협회를 만들며 다양한 활동을 한 이완석의 족적을 작품과 아카이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5월 4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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