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전세사기, 사회적 재난 아니라는데

국민일보

[한승주 칼럼] 전세사기, 사회적 재난 아니라는데

입력 2023-05-03 04:20

누군가에겐 재테크 수단이지만
어떤 이에겐 고단한 하루 쉼터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공간

사기꾼 일당에 속수무책 당한
청년 수백명이 전 재산 잃고
거리에 나앉게 된 재난 수준

정치권은 속히 정쟁 멈추고
피해자들의 폭풍 눈물 닦아줄
실효성 있는 특별법 만들어야

누군가에겐 재테크의 수단이지만, 어떤 이에겐 고단한 하루의 끝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쉼터다. 누군가에겐 많고 많은 집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어떤 이에겐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공간이다. 최근 ‘사기’라는 단어와 함께 입길에 오르는 전세 얘기다.

평생 모은 돈에 대출까지 끌어모아 집을 구했다. 꼼꼼히 알아보지 않은 게 아니다. 주인이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 게 마음에 걸렸지만, 부동산에서 괜찮다고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보증금을 대신 책임지겠다는 합의서까지 써줬다. 다른 동네에 비해 저렴한 데다 신축빌라라 마음에 들었다. 새롭게 출발했다는 기쁨도 잠시, 알고 보니 이게 다 사기란다. 처음부터 계획적인 거였다. 집주인은 돈이 없어서 보증금을 못 준단다. 공인중개사도 한패라서 받아놓은 각서도 소용없다. 사기꾼 일당은 잡혔지만 긴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돈을 돌려받을 길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집은 곧 경매에 넘어간다. 낙찰되면 전세보증금 한 푼 못 받고 거리에 나앉을 판이다. 언제 쫓겨날지 몰라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극도의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인천 미추홀구에서만 청년 세 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나약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인내심과 의지, 성실함 없이는 불가능한 스포츠 국가대표 출신도 있었다. 이렇게 이 지역에서만 보증금을 떼인 사람이 700여명이다. ‘인천 건축왕’ 일당이 가로챈 보증금은 380억원이 넘는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을 장만한 20·30대, 신혼부부, 사회 초년생이다.

사기꾼은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속였다. 소규모 아파트와 빌라를 지은 후 전세를 주고, 전세금을 빼돌려 또다른 빌라를 지었다. 이렇게 지은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최대한도로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또 빌라를 짓고 전세금을 빼돌리고, 그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이런 식으로 무려 2800여채나 짓고 세입자를 들였다. 자기 돈은 거의 안 들이는 ‘봉이 김선달’ 같은 방식이었다. 은행은 마구잡이로 3500억원이나 빌려줬다. 집값과 전셋값이 떨어지면 나중에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욕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지난해 하반기 서울 강서구에서 이와 유사한 ‘빌라왕’ 사건이 터졌을 때 국회는 일을 하는 척했다. 당시 세입자 피해 구제와 재발 방지 법안이 30여개나 발의됐으나 아직도 절반 넘게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막을 시간이 있었다. 정치권이 정쟁에 몰두하느라 민생을 외면했다. 법안을 미적거리는 동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청년 세 명이 숨졌다. 대형 전세사기 사건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내놓은 ‘전세사기 특별법’의 핵심은 피해자들에게 살고 있는 집의 경매 우선매수권을 주고, 살 돈이 없으면 싼 이자로 대출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를 원하지 않으면 그 집을 국가가 산 후 이들에게 임대해 주겠다는 방안이다. 문제는 피해자 입증이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는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등 6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이를 모두 충족해야 지원 대상이 된다고 했다가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보증금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라는 조건을 삭제하고, 요건을 4가지로 줄인 수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있고, 지원이 필요한 피해자들이 제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희망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 뭔가 될 것 같긴 한데 실제로 도움을 받기는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다 결국 흐지부지돼 다시 이들을 절망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이 아니다’고 했다. 또 ‘다른 사기 사건과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 ‘먼저 보증금을 보상해 주고 나중에 국가가 범죄자에게 돌려받는 방식은 어렵다’고 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20·30대 젊은이 수백명이 사기를 당해 모든 자산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가히 사회적 재난 수준이다. 무슨 정책이든 안 된다는 이유를 찾으려면 수만 가지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국가가 도우려고 마음을 먹으면 안 될 일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그게 국민이 자신을 대변해 달라고 정치인에게 준 권한이고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눈뜨고 코 베인 일을 겪고, 폭풍 같은 슬픔에 빠져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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