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교단에 선 헌책방 주인장

국민일보

[오후 3시의 헌책방] 교단에 선 헌책방 주인장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입력 2023-05-27 04:02

헌책방에서 일한 지도 그럭저럭 10년을 넘긴 어느 해 초여름의 일이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런데 참 묘한 건, 소설을 보면 늘 안 좋은 일은 우연히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되는 일이 많다.

전화를 건 사람은 모 중학교 교사였다. 방학을 앞두고 특별한 기획을 했는데 제목이 ‘진로 탐색 수업’이라는 거다. 중학생이라면 아직 사회에 나가 일할 나이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는지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교사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교사는 내가 헌책방 주인장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특강 형식으로 1시간 정도 학생들 앞에서 풀어 달라는 제안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몇 명 강사로 섭외가 된 모양이다. 그 면면을 살펴보니 발레리나, 웹툰 작가, 작곡가, 팟캐스트 진행자는 물론 부동산 경매사와 증권회사 직원, 그리고 외환 관리사도 있었다.

특강 방법은 이렇다. 똑같은 시간에 각 교실에 강사 한 명이 들어가 대기하고 이후에 100여명의 학생이 관심 가는 직업이 쓰인 교실로 각각 들어가 강사에게 특강을 듣는 식이다. 대학생이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스스로 선택해서 듣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이런 활동도 하는가 보다 싶어서 흥미가 당겼다.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알아보고 이론만이 아닌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학생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환 관리사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중학생들이 듣고 싶어 할까? 분명히 따분한 이야기가 될 게 안 봐도 뻔한데 말이다. 반면에 헌책방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온종일 책에 둘러싸여 일한다는 건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멋진 직업이다. 나는 교사의 기획을 전화로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벌써 교단에 올라가 떠들썩하게 쏟아지는 중학생 아이들의 질문 세례를 받는 즐거운 상상에 젖었다.

그러나 특강 하는 날, 즐거운 상상은 곧 괴로움으로 바뀌었다. 나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칠판 앞에 서 있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가 서 있는 교실이 아니라 다른 교실에서 들리는 거였다. 내 앞에는 아무도, 단 한 명도 앉아 있지 않았다. 특강이 시작됐는데 아무도 내 교실에 들어오지 않아서 다른 교실을 살펴보러 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그토록 속으로 비웃었던 외환 관리사 강의실에는 10여명 넘는 학생들이 있었다. 다른 곳도 그 정도는 됐다. 중학생들은 헌책방이라는 직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다!

폐강 선언이 내려진 강의실에서 내게 연락했던 교사와 둘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다시 헌책방으로 돌아왔다. 헌책방 일은 물론 재미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속으로라도 남의 직업을 비웃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오늘의 폐강 사건은 아마 그런 깨달음을 주기 위한 신의 계획이 아니겠는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만 싶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