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원피스에 버선 신으라’는 종로구 건축 행정

국민일보

[손영옥의 컬처 아이] ‘원피스에 버선 신으라’는 종로구 건축 행정

입력 2023-05-25 04:06 수정 2023-05-25 04:06

만약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붕에 전통 기와가 얹혀 있다면 지금 어떤 느낌이 들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럴 뻔했다. 1974년 개관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건축가 엄덕문을 청와대로 불러 “지붕에 기와와 서까래를 씌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덕문은 “기와만이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전통을 현대화하겠다”고 대통령을 설득했고, 덕분에 끔찍한 결과는 피하게 됐다. 그런데 1970년대에도 피했던 끔찍한 관치 건축이 2023년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전통을 지켜야 하니 돌담을 둘러야 하고, 이왕이면 담 위에 기와까지 얹으면 좋을 거라고 권고하는 행정이 ‘대한민국 지방자치 1번지’ 종로구에서 행해지고 있다.

한미사진미술관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시대를 접고 종로구 삼청동에 새 건물을 지어 지난해 말 이사 왔다. 이름도 ‘뮤지엄 한미’로 바꿔 재도약의 의지를 다졌다. 개관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한 미국의 사진작가 겸 화가 윌리엄 클라인 유고전이 그제 개막해 다녀왔다.

전시도 전시지만 건축물을 보는 기쁨에 관람이 더 즐거웠다. 송영숙 관장은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집처럼 지어주세요”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기오헌 건축사무소의 민현식 건축가는 건축주의 주문대로 자본의 냄새가 침투하지 않은 마지막 땅인 마을버스 11번 종점 인근 언덕진 땅에 주변 풍광에 스며들 듯 건물을 지었다.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모더니즘 건축 형식이다. 하지만 직사각형과 삼각형이 만들어내는 외형은 한국 전통 기와 건축이 주는 선의 맛을 추상화한 듯 수더분하다. 외벽 마감재인 구운 흙벽돌은 대리석과는 다른 자연친화적인 맛을 풍긴다.

그러나 처음 이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경악을 하게 된다. 건축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돌담이 건축물의 정면(파사드)을 완전히 가린 채 둘러쳐져 있기 때문이다. 돌담 그 자체는 얼마나 정겨운가.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 맞다. 하지만 그런 돌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공간에 인위적으로 조성할 경우 ‘흉물’이 된다.

이유를 알아봤더니 건축 행정에 원인이 있었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거해 종로구청에서 적용하는 ‘종로구 지구단위계획-민간지침 (북촌) 제29조 담장 조항은 ‘가로에 면한 담장의 높이는 2.1m 이하로 하고 장대석, 사고석, 점토벽돌, 자연석, 회벽 등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 무늬와 장식을 구현한다’고 규제한다. 그러면서 ‘담장 상부에 기와를 얹는 것을 권장’한다.

미술관이 위치한 장소는 ‘북촌 한옥 마을’과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북촌 지구에 일괄적으로 묶어 전통 방식의 담장을 쌓도록 규제하는 것은 무엇이 전통의 계승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탁상행정이다. 뮤지엄 한미의 다른 담장은 모두 ‘개비온 담장’(철망 안에 돌을 채워 넣은 담장)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규제에 묶여 정면만 그렇게 못한 것이다. 정면도 호박돌을 쌓아 올릴 게 아니라 개비온 담장을 해야 통일감을 준다는 건 비전문가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데 말이다. 관치행정 탓에 결과적으로 원피스에 버선을 신은 이상한 건물이 됐다.

건축가들 사이에 종로구는 악명이 높다. 건축가 A씨는 “종로구에 집 지어본 건축가들은 다 혀를 내두른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며 1층 외부에 정자를 둬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종로구청이 유연성을 발휘한 전례가 없는 건 아니다. 같은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경우 협의 끝에 ‘예외’처럼 돌담이 없다. 송월동에 신축한 스위스대사관은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 추상화하면 좋을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굳이 갓 모양을 씌우고 돌담을 두르지 않아도 한국미의 현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건축은 건축가의 전문성에 맡기는 행정을 보고 싶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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