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감정화 사회, 감정적 정치

국민일보

[뉴스룸에서] 감정화 사회, 감정적 정치

천지우 정치부 차장

입력 2023-06-05 04:05

모든 사안을 ‘우리 대 저들’로 갈라서 판단해 우리 편이 아닌 것은 배제하고 징벌하려 하는 ‘정치적 부족주의’, 싫고 불편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반지성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를 잘 표현해주는 용어다. 여기에 비슷한 맥락의 하나를 더 추가할 수 있다. 오쓰카 에이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의 책 제목인 ‘감정화하는 사회’다.

오쓰카는 ‘감정화’를 “이성이나 합리가 아니라 감정의 교환이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엔진이 되고, 사람들이 감정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기피하게 되는 것”이라며 “감정이 가치 판단의 최상위에 놓이고 감정을 통한 ‘공감’이 사회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되는 사태”라고 정의했다. 감정화하는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중립적 관찰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자의 감정이 서로 공감하면 더 거대한 감정이 될 뿐이다.

중립적 관찰자는 원래 정치나 미디어, 문학의 형태로 ‘외화’되고 제도화됐었는데 현재 이것들이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져 있다. 오쓰카는 “감정적인 정치와 감정적인 미디어, 감정적인 문학이 넘쳐 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 단번에 감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선호하고, 정치도 이에 복무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당력을 집중하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공세를 보자. 국민 건강이 걸려 있는 데다 문제 제공자가 일본이니 공격하기 딱 좋은 소재다.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가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 확실한 안전 대책과 투명한 정보 공개를 일본에 계속 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염수 방류=방사능 테러, 우물에 독극물 풀기’라는 식으로 선동하고 “국제기구의 검증도 믿을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볼썽사납다. 사실과 거리가 먼, 자극적인 말로 적개심만을 부추기는 행위다. 세상에 자국 앞바다에 자국민들 다 죽으라고 독극물을 푸는 정신 나간 나라가 어디 있나.

우리 국민 사이에 반일 감정이 워낙 강고하니까 거리낌 없이 극단적인 말을 쏟아내는 것일 테다. 또 일본을 불신하고 증오하는 감정이 민주당 진영에 뿌리 깊은 탓에 자동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응일 수도 있다. 오쓰카는 “일본을 무조건 자랑스러워하는 감정 표출이 인터넷에서 집합지가 돼 역사 인식을 형성하고 있다”며 ‘역사의 감정화’ 현상도 지적했다. 과거의 사실을 부인하면서 스스로에게 기분 좋은 감정적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한국의 최근 사례로 ‘전라도 천년사’ 논란을 들 수 있다. 전남·북도와 광주시가 발주해 연구자 200여명이 참여한 전라도 천년사 편찬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서기’에 기록된 지명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일부 단체와 정치인 등이 ‘식민사학 역사서’라고 비난하며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역사학계는 이를 “사이비 역사를 강변하는 이들의 악의적인 매도·선동”으로 규정한다. 학문의 범주를 벗어나 역사를 해석하는 ‘사이비 역사’ 추종 세력이 억지 주장을 펴면서 책의 편찬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사이비 역사 추종 세력은 주류 학계를 친일파로 매도하기 때문에 반일 감정이 투철한 대중 일부의 공감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엄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역사, 오로지 기분이 좋아지려고 허황한 주장을 짜깁기한 것이 진짜 역사일 리 없다.

감정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감정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생각’이다. 마음속에 중립적 관찰자를 두고 숙고를 거듭해 비이성적 정념을 걸러내야 잘못된 판단과 그로 인한 파국을 피할 수 있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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