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살인의 동기

국민일보

[가리사니] 살인의 동기

황인호 사회부 기자

입력 2023-06-05 04:06

기존 범죄 공식 벗어난 사건
범죄 매력 때문에 살인하는
시대가 현실 된 것 같아 섬뜩

살인사건 해결의 열쇠로 꼽혀온 고전적 금언 중에 ‘누가 이득을 보는지 주목하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추리소설에도 인용됐는데,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대개 인명을 앗아가는 중범죄는 그 목적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동기만 발견되면 살인자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지난 3월 29일 발생한 ‘서울 강남 납치 살해 사건’의 경우 살인의 동기를 쫓아가다 보니 실제 납치 살해 범행을 저지른 황대한, 연지호뿐 아니라 이들에게 범행을 청부한 이경우, 배후 유상원·황은희 부부까지 검거할 수 있었다. 경찰은 이경우와 유씨 부부, 피해자 부부가 가상화폐 투자와 관련해 금전적 갈등이 있었고, 이 원한이 청부살인까지 이어진 것으로 결론 냈다.

그런데 최근 이런 기존 범죄 공식에서 벗어난 사건이 발생했다. 과외 중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유기한 정유정은 경찰에 차분한 목소리로 “실제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뚜렷한 살해 동기가 있는 게 아닌,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사건 직후 공개된 CCTV에는 범행 후 시신 유기를 위해 집에서 여행용 가방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끄는 모습이 담겼다. 불안감이나 심적 동요는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던 무동기 범죄는 전에도 여럿 있었다. 최단 기간(10개월) 최다 살인(20명)을 저지른 연쇄살인범 유영철도 그랬다. 당시 경찰 수사는 원한 관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유영철에 희생당한 20명은 그와 원한 관계가 없었다. 유영철 사건을 겪고서야 한국에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소개됐다. 사이코패스는 죄의식을 느끼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태연히 한다. 유영철이 그랬다.

지금은 잘 알려진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도 이 사건으로 도입됐다. 이후 이 기법으로 유영철에 대한 다양한 분석 결과들이 나왔다. 그의 무동기 살인에도 숨겨진 자신만의 이유, 분노가 있었다. 유영철이 범행 초기 부유층을 대상으로 삼은 건 자신의 불행이 돈이 없어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유흥업소 여직원으로 범행 대상을 옮긴 것도 유흥업소 여직원이었던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라는 트리거가 있었다.

한 프로파일러는 “무동기 범죄가 분명 존재하지만, 엄밀히 말해 동기 없는 범죄는 없다”고 했다. 보통 무동기 살인이라 불리는 것들엔 금품을 포함한 경제적 이익, 치정, 이상 성욕 등 일반적 의미의 동기가 없을 뿐 범인만 알고 있을 동기는 반드시 숨어 있다는 것이다.

정유정에 대해서도 많은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5년간 무직으로 있으면서 휴대전화에 다른 사람과의 통화나 문자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은둔형 외톨이’가 자신만의 세계에 심취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영어 실력이 중학교 3학년 수준이라는 정유정의 진술에 따라 그가 갖고 있는 영어 콤플렉스가 범행 동기와 관련됐다고 추측하는 이도 있다. 이런 이유들 모두 그의 범행 동기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만 갖고 판단하기에 이 이상은 무리다.

과거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고유정이나, 사망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계곡에서 죽인 이은해와도 다르다. 오히려 정유정 본인이 말한 대로 살인해보고 싶었다는 기괴한 이유가 진짜 동기일 수 있다. 이 경우 살인이라는 행위에서 흥미를 느끼는 새로운 형태의 범죄 유형이 된다.

영국의 비평가 콜린 윌슨은 살인의 유형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고찰한 그의 저서 ‘살인의 철학’에서 현대를 ‘살인 그 자체를 위한 살인의 시대’ ‘범죄의 매력 때문에 살인하는 시대’라고 했다. 그 글이 현실이 된 것 같아 섬뜩하다.

황인호 사회부 기자 inhovator@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