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의대 정원 대폭 확대, 정부가 결단할 때다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의대 정원 대폭 확대, 정부가 결단할 때다

입력 2023-06-06 04:20

의사협회는 의약분업 사태 때
총파업 통해 ‘의대 정원 감축’
‘면허취소 기준 축소’ 챙겨

의료법은 최근 개정돼 제자리
찾았지만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으로 꽁꽁 묶여 있어

의사 절대 부족으로 필수의료
마비, 소아과 진료대란, 지방
의료시스템 붕괴 직전 내몰려

최소 1000명 늘리고 기피과
수가 인상과 지역의사제 도입
강구하길… 정부는 의사 눈치
보지 말고 이제 국민 편에 서야

의사 집단이 사상 처음으로 총파업을 벌인 건 2000년 의약분업 사태 때였다. 당시 김대중정부는 의약품 오남용을 막기 위해 의사가 처방하고 약사는 그에 따라 조제·판매하도록 하는 의약분업 도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핵심 권한을 빼앗기는 데 저항한 의사들이 그해 2월 대규모 집회를 연 이후 10월 5차 파업까지 근 1년 내내 투쟁을 벌였다. 의약분업은 7월에 시행됐다. 우여곡절 끝에 이 파동은 그해 12월 의·약·정(의료계·약계·정부)이 약사의 대체조제를 금지하는 내용 등의 약사법 개정안에 합의해 종료됐지만 초유의 의료대란 속에 국민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의사 집단은 시대적 과제인 의약분업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 와중에 굵직한 전리품을 챙겼다. 의료수가 대폭 인상 외에도 의대 입학 정원 감축, 면허취소 기준 축소라는 망외의 전과를 올렸다. 정부가 의료계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의대 정원은 10% 감축안에 따라 단계적으로 축소돼 2006년까지 3058명으로 줄어든 뒤 지금까지 이 숫자에 묶여 있다. 면허취소 기준이 ‘모든 범죄’의 금고형 이상이던 의료법 조항도 ‘의료관계법 위반 범죄’로 제한돼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 가운데 나홀로 특혜를 받아왔다.

두 사안은 시급히 원상회복됐어야 했다. 다행히 의료법은 최근 야당 주도로 개정돼 제자리를 찾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의사 집단의 몽니는 여전하다.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반발임에도 정부가 의사들 구미에 맞게 이 조항을 재개정하겠다는 뜻을 시사한 것 또한 어처구니없다. 심각한 부조리는 18년째 동결 중인 의대 정원이다. 간호대 입학 정원은 이 기간 1만1206명에서 2만3183명으로 배 이상 늘어났는데 의대 정원만 요지부동이다. 의사의 절대 숫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누적돼온 문제점이 지금 전국 의료 현장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연쇄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기피과인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 현장이 마비되고 소아과는 진료대란이 벌어지는가 하면 의사들의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지방 의료시스템은 무너지고 있다.

근본 원인은 의사 인력 부족이다. 대한의사협회가 인구 감소로 의사 공급 과잉을 우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억지에 불과하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증가를 간과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건통계 2022’를 봐도 한국의 1000명당 의사 수는 최하위권인 2.5명으로, OECD 평균(3.7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2035년엔 약 2만7000명의 의사가 부족할 거라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분석도 있다. 이러니 ‘빅5’ 병원 간호사가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하고, ‘응급실 뺑뺑이’로 병원을 전전하다 숨지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하는 게 아닌가. 국내 1호 어린이병원인 서울 소화병원이 최근 휴일 진료를 중단한 것도 의사를 구하지 못한 탓이다.

의대 정원은 대폭 확대돼야 한다. 의약분업 때 줄어든 정원 351명을 복원하는 ‘찔금 증원’ 정도로는 안 된다. 최소 1000명 이상 늘려야 한다는 의료정책 전문가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문재인정부가 2020년 의대 정원 확대 등을 추진하다 의사 집단의 총파업에 굴복한 바 있지만 이젠 국민 생명과 건강권이 현저히 위협받고 있는 실정인 만큼 현 정부는 의사 집단의 눈치를 봐선 안 될 일이다. 기득권 노조엔 원칙적으로 대응하면서 최고의 특권층인 의사 집단에는 무력한 모습만 보인다면 정부의 이중성을 드러낼 뿐이다.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의사 공급부터 늘려야 한다. 대책의 출발점이자 필수조건이다. 물론 충분조건이 될 순 없다. 당장의 현안인 필수의료 기피나 지역 의료진 부족 현상은 좀 더 정교하고 다각적인 정책 설계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필수의료 분야의 파격적인 수가 인상과 보상, 공공의대 설립 및 지역의사제 도입 등을 통해 붕괴되는 의료시스템을 획기적으로 재편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직역 이기주의에 매몰된 의협의 주장은 오로지 ‘기-승-전-수가’로 귀결된다. 국민 건강은 사실상 뒷전이다. 의료 공백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정부가 의사 집단에 끌려다니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게 국민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왜 의사들이 의사 숫자를 결정하나.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는 바로 의료소비자인 국민인데 말이다. 정부가 책임을 지고 신속히 결단해야 하는 이유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