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이슬처럼 사라졌다

국민일보

[세상만사] 이슬처럼 사라졌다

최승욱 정치부 차장

입력 2023-06-07 04:07

간호사 단체와 의사 단체가 극렬히 충돌했던 간호법 제정안이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투표에 부쳐졌다. 결과는 재석 의원 289명 가운데 찬성 178표, 반대 107표, 무효 4표로 부결됐다. 이렇게 간호법은 이슬이 아침 햇볕에 마르듯 사라졌다.

사실 간호법 제정안의 폐기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이 지난 4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을 처리했을 때, 그보다 앞서 지난 2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직회부 요구안을 처리했을 때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했다.

그럼에도 야당은 밀어붙였고, 여당은 보란듯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서 국회에 재의를 요구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여 만에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 두 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 됐다.

지난 4월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국회에 재의를 요구했던 양곡관리법 개정안 역시 간호법 제정안처럼 ‘폐기’라는 딱지를 달게 됐다.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것이 법안의 골자인데, 야당은 농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고 주장했고 정부·여당은 과도한 시장 개입과 재정 부담을 이유로 맞섰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이어 간호법 제정안까지 일사천리로 폐기된 후 한 야당 중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화도 없고, 협상도 없고, 서로를 향한 인내도 없다. 정치가 완전히 실종됐다. 여야가 힘겨루기만 하다 보니 법안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국민만 불쌍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대통령의 재의를 요구했을 때 자력으로 재의결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당은 법안을 본회의에서 밀어붙였다. 여당도 야당이 법안을 강행 처리할 것이라고 이미 수차례 예고한 상황에서 충분한 협의에 나서지 않았다. ‘상원’이라 불리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여당에 발이 묶였던 이들 법안은 60일이라는 ‘족쇄’가 풀리자마자 본회의로 직행했다.

결국 남은 건 여야의 자존심 싸움뿐이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절실했을 법안이었을 텐데, 여야가 차분히 국민을 먼저 생각하며 협상을 벌였다면 합의점을 찾지 못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로 ‘잘못은 네가 했다’고 몰아가며 힘으로 밀어붙이고, 힘으로 막아버렸다. 그 사이에 국민은 없었다.

더 막막한 것은 앞으로도 당분간 실종된 정치와 대화, 협상이 복원될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여야 간 이견이 뚜렷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과 ‘공영방송지배구조개선법’(방송법 개정안 등)의 강행 처리에 숨을 고르고 있지만, 이들 법안 역시 ‘야당 단독 처리’에 이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그리고 ‘재투표 부결에 따른 폐기’의 경로를 걷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이들 법안 역시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간호법 제정안의 뒤를 이어 이슬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엔 “대통령의 거부권이 예상됨에도 야당이 강행 처리했다”는 여당의 비난과 “대통령과 여당이 국회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야당의 비판만 남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국민은 또다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총선까지 앞으로 10개월, 여도 야도 지금처럼 힘겨루기를 계속한다면 총선 후에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은 그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승욱 정치부 차장 apples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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