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백인제 가옥을 거닐며

국민일보

[샛강에서] 백인제 가옥을 거닐며

우성규 종교부 차장

입력 2023-06-08 04:08

백인제 가옥은 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곳이다.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헌법재판소를 지난 뒤 가회동 주민센터에서 좌회전하면 골목길 오른쪽 돌층계 위에 웅장한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대문을 지나면 넓은 정원을 품은 사랑채가 나온다. 1907년 경성박람회 당시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으로 지어졌다. 한지가 아닌 서양식 유리창으로 마감한 점, 안채 일부를 2층으로 지은 점, 사랑채와 안채를 복도로 연결한 점이 독특하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작은 한옥 12채를 헐어 지금의 자리에 건립했다. 한상룡은 매국노 이완용의 외조카다. 자금 사정이 나빠지자 1928년 한성은행에 집의 소유권을 넘겼고 1935년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 최선익이 이를 인수한다. 최씨는 스물일곱 살이던 1932년 중앙일보(1933년 조선중앙일보로 개칭)를 인수해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 운동에 앞장섰다.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1899~?) 박사와 가족이 이 가옥을 소유한 것은 1944년부터다. 가옥 자체가 친일 매국을 넘어 자주독립으로 나아간 역사를 품고 있다.

‘골목길 역사산책 서울편’을 저술한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은 “백인제는 잘 몰라도 백병원과 인제대학교를 모르는 이는 없다”고 말했다. 최근 기자와 함께 백인제 가옥을 둘러본 최 소장은 이 가문의 네 형제 이야기를 들려줬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 부친 백희행은 셋째 백인제를 포함해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을 용 봉황 기린 붕새 등 상상 속 동물들을 따서 지었다. 첫째 백용제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신민회가 세운 평양 대성학교에 다니다 익사 사고로 숨졌다. 둘째 백봉제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중앙고보에서 교사와 교감을 지냈다. 막내 백붕제는 교토제국대학 졸업 후 고등문관시험 사법 행정 양 과에 합격해 군위군수를 역임했다.

백인제의 고향 평북 정주는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이자 옥중 순교자인 백홍준이 활동한 지역이다. 1919년 3·1운동 때 121명이 일경의 총에 맞아 숨졌으며 당시 일제는 정주의 모든 교회를 불태워 버렸다. 백인제는 정주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1기로 입학했으나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운동에 뛰어들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1920년 어렵게 학교에 돌아오고 수석으로 경성의전을 졸업하지만, 일제는 그에게 의사면허증을 발급하지 않는다. 총독부 병원에서 2년간 더 일한 후에야 겨우 의사면허증을 받는다.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경성의전 교수가 된 백인제는 1928년 배화여고 교사 최경진과 결혼한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신랑과 신부 좌우로 춘원 이광수 허영숙 부부가 들러리를 서고 있고 애제자 장기려 박사가 턱시도 차림으로 오른쪽 맨 끝에 서 있다. 대한민국 최고 외과의사이던 백인제는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북된다. 1955년 박헌영이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혐의로 북한에서 숙청될 무렵 백인제도 북에서 체포됐고 이후 행적을 확인할 수 없다.

인제대 서울백병원이 80여년 만에 폐원 결정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울백병원은 1941년 백인제외과병원을 모태로 백인제가 1946년 사재를 털어 민간 최초 공익법인 형태로 확대시킨 병원이지만, 도심 공동화에 따른 적자 누적을 피할 수 없었다. 백인제 가옥은 백인제 납북 후 부인 최경진이 반세기 넘게 보전하다 2009년 서울시로 이관해 오늘날 국내외 관광객의 ‘사진 맛집’ 성지가 됐다. 서울백병원도 슬기로운 이관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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