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시장에 간다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 시장에 간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입력 2023-06-09 04:06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받을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쉬운 질문이고, 곰곰 톺아보면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매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레몬 한 알을 쟁반에 놓고 오래 봐요.” “낡고 편한 운동화를 신고 산책하러 나가요.” “반려 고양이와 눈을 맞춰요.” 요즘 누군가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시장에 간다고 답할 것이다.

1970년대 주상복합 아파트로 유명했던 서울 유진상가 뒤편에 인왕시장이 있다. 나는 괜히 뒷짐 지고 느릿느릿 시장을 돈다. 제철에만 맛볼 수 있는 초당 옥수수나 죽순이 나왔는지 주인에게 물어본다. 쪽파를 다듬던 할머니가 깜빡 조는 순간, 옆에서 참외가 싸네 마네 가볍게 실랑이를 벌이던 아주머니가 그냥 발걸음을 돌린다. 막걸리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부추전을 집어 드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불콰하다.

청과상회 앞을 지날 때는 꽃향기를 맡듯이 코를 높이 들고 숨을 깊게 쉰다. 매실과 포도와 수박. 과일의 이름은 어쩌면 이렇게 모양과 맞춤하게 떨어지는가. 가끔 시를 높고 귀한 자리에 올려두고 싶을 때마다 나는 다시 일상의 감각을 회복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 시장에 가서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힘이 한데 모인 것을 본다. 흥성한 시장의 활기가 나에게 호기심과 생기를 주기 때문이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난다, 2023)의 서문을 떠올린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시인은 그것이 사랑이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한 줄의 시를 쓰지 못해도 괜찮다. 무더기로 쌓인 양말을 보며 생의 명랑을 새롭게 실감하는 것으로 족하다. 집에 가는 길, 김부각과 참외를 넣은 장바구니가 제법 묵직하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