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잼버리의 정치화가 만든 비극

국민일보

[여의춘추] 잼버리의 정치화가 만든 비극

고세욱 논설위원

입력 2023-08-11 04:02

개최지 부적절한 새만금인데
정치가 끼어들며 잼버리 유치
지자체 이권 미끼 지적 받아

정부도 전 정부 유산이라 소홀
유례 없는 실패 원인 됐다
1171억 대회의 결말 아프다

32년 전 영상이 요새 화제다. 한국 미국 일본 등 각국 청소년들이 야영장에 도착해 천막을 친다. 한국의 전통놀이인 씨름과 그네를 즐기는 푸른 눈의 학생들 입에 웃음꽃이 핀다. 진흙탕에 몸을 던지는 코스에 환호성이 울린다. 제목은 ‘1991년 제17회 고성 세계잼버리’. 이달 초 유튜브로 소환되더니 업로드된 지 6일 만인 10일 현재 조회수 60만에 이르렀다.

과거 영상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영광의 순간을 떠올리기 위함이다. 1988 서울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는 반대로 현재의 치욕을 잊으려는 생각 때문이다. 고성 잼버리 영상에는 ‘저렇게 체계적이고 생동감 있는 대회를 X판으로 만들었다니’ 등의 자조적 댓글이 쏟아졌다. 준비 소홀과 운영 미비로 만신창이가 된 2023 새만금 잼버리 효과다.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수많은 초대형 국제행사들을 성공리에 치렀던 나라다. 그런데 마이너 행사 하나에 무너졌다. 혹자는 국내외 관심이 큰 행사에만 집중하는 국민성을 논하지만 각종 마이너 대회도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폭염 못지않게 화장실 위생 상태가 최대 문제였다는 점도 놀랍다.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국내 화장실 청결도는 세계적 수준이다. 해외에 가보면 가이드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만큼 깨끗한 곳은 없다”였다. 그런데 영국 BBC는 야영장 화장실을 ‘보건 위협’이라 했다. 우리의 강점이 전혀 부각되지 않았다는 건 기본을 잃었다는 얘기다.

과정을 복기해보면 잼버리의 정치화가 문제였다. 알려진대로 간척지 새만금은 잼버리 개최지로 부적절했다. 그럼에도 전북도는 밀어붙였다. 전북은 2015년 고성과의 세계 잼버리 유치전에서 “강원은 91년에 한 번 했으니 이번에는 호남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함종한 전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 호남 배려론이다. 이듬해 총선을 앞둔 정부와 정치권은 호남의 요구를 무시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폭염, 배수에 대한 우려에 전북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풍성한 숲 공간을 조성하겠다”고 장담했다. 합리성, 타당성이 아닌 정치적 고려를 앞세워 개최권을 따낸 반면 대회 공약은 식언이 돼버렸다.

개최지 선정 이후가 더 가관이다. 잼버리 성공에 필수라며 예비타당성 면제까지 받은 새만금 국제공항은 내년에야 첫 삽을 뜬다. 잼버리 메인 행사 건물로 쓰겠다던 글로벌청소년리더센터는 내년 3월 말 준공 예정이다. 행사가 끝난 뒤 관련 시설이 들어서는, 선후가 바뀐 일정이다. 잼버리가 사실상 새만금 개발 등 지역 민원 해결을 위한 미끼였던 셈이다. 전북 정치인들도 거들었다. 젯밥에만 관심 쏟은 지자체에 대회를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있었을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이유야 어쨌든 전북도의 손을 들어줬으면 국제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대회 성공을 위해 관리감독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게 중앙정부다. 정부는 이를 소홀히 했다. 대회가 파행하니 전 정부 탓을 하는 등 정치 문제로 변질시켰다. 주요 국제행사는 보통 개최되기 5~10년 전에 결정된다. 5년 단임제의 한국은 전·현 정부의 협업 없이는 국제행사를 원활히 치르지 못한다. 자연히 전 정부와의 소통과 인수인계가 중요하다. 전 정부가 못한 부분을 채워넣는 게 현 정부 몫이다. 정권 교체라는 비슷한 환경에서 월드컵과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리에 열렸다.

하지만 정부는 문재인정부 유산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더구나 대선 때 폐지를 공약한 여성가족부가 대회를 총괄했다. “정부가 잼버리에 관심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남 탓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만 알린 격이다. 지자체 정치꾼들의 잇속 챙기기와 정부의 무관심·진영 논리가 더해지니 잼버리가 삐걱댈 수밖에 없다. 개막 후 잇단 비판에 정부는 69억원의 예비비를 투입해 봉합에 나섰지만 뒷북 대응일 뿐이다.

새만금 잼버리는 도전과 호연지기의 취지는 사라진 채 ‘코리아 잼버리’ ‘한국 패키지 관광’으로 바뀌었다. 이마저도 민간 기업들과 다른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에 대회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 것이다. 정치가 끼어들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교훈만 얻었다. 1171억원의 예산을 들였는데 98억원짜리 고성 잼버리에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비용 대비 너무나 쓰라린 결말이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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