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마피아 국가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마피아 국가

입력 2023-09-01 04:20

숱한 정적을 암살해온 푸틴
프리고진의 죽음을 연출하며
원칙 깨고 몇몇 파격을 보였다

권위 세우고 권력을 유지하려
충격과 공포의 메시지를 담은
이 사건 모든 장면에
마피아식 통치술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어

푸틴의 러시아, 명실상부한
'마피아 국가'로 전락했다

바그너 용병이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던 6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TV 카메라 앞에 섰다. 길지 않았던 그 대국민 연설에 바그너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운명을 읽어볼 단서가 두 가지 들어 있었다고 한다. ①바그너의 행위를 ‘배신’이라 규정했다. 푸틴은 어느 인터뷰에서 질문자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지도자에게 관용의 덕목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네. 하지만 모든 것에 그럴 순 없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은 어떤 게 있을까요?” “배신.” ②연설 내내 프리고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정적을 공개 비판할 때 푸틴이 늘 보였던 습관이다. 누구를 말하는지 아무도 모를 수 없지만, 절대 자기 입에 올리지 않는. 그렇게 지목된 이들은 대부분 죽었다.

이런 연설 이후 어정쩡하게 반란이 봉합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이제부터 먹는 것을 각별히 조심하겠다”고 했다. 푸틴이 숱한 정적과 배신자를 제거할 때 옛 소련 과학자들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독살 기법을 애용했음을 상기시켰다. 빌 번스 CIA 국장은 푸틴을 “복수의 사도”라 부르며 “프리고진이 계속 살아있다면 내게는 그게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화 ‘대부’의 마피아 두목 돈 콜레오네의 대사를 인용했다. 직역하자면 “복수는 식은 뒤에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란 말인데, 시간이 흘러 배신자가 배신의 행위를 잊고 방심할 때 제거하는 것이 푸틴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복수의 원칙이란 거였다.

그렇게 ‘음식이 식는 시간’을 유럽 독립언론 벨링캣의 탐사기자 그로제프는 6개월로 보았다. 푸틴이 배후로 지목됐던 여러 죽음을 파헤쳐온 그는 바그너 반란 이후 “6개월 안에 프리고진이 죽거나 두 번째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 예견했다. 푸틴이 20여년 집권하며 구축해온 마피아 시스템의 룰을 스스로 깨뜨린 건 이 대목이었다. 프리고진의 비행기는 반란을 일으킨 지 꼭 두 달 만에, 번스나 그로제프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떨어졌다. 오랜 원칙을 허물었다는 건 급했다는 뜻이다.

푸틴의 암살은 언제나 메시지(나를 거스르면 죽는다는)였고, 그는 “메시지를 전하려거든 누가 보냈는지 분명히 알게 하라”는 마피아 세계의 격언을 실천해왔다. 반정부 지도자 나발니의 독살을 시도하면서 굳이 러시아군 화학무기 노비촉을 사용한다든가, 정적 넴초프를 저격하면서 굳이 크렘린궁 주변을 장소로 택해 그 죽음에 담긴 메시지의 발신인이 자신이란 흔적을 남겼다.

프리고진은 반란 이후 두 달간 아프리카를 분주히 오갔다. 각국 독재자와 군벌을 만나 자신의 용병 비즈니스가 여전히 건재함을 알리고, 새로 쿠데타가 일어난 니제르에 가서 ‘영업’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내전 지역에서 처리했다면 암살 의혹을 일축하기 쉬웠을 텐데, 그의 비행기는 굳이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다음 날 모스크바 인근 상공에서 추락했다.

배신자의 죽음에 이렇게 자신의 지문을 남긴 방식은 기존 암살과 다르지 않았지만, 파격은 그 스펙터클함에 있었다. 대낮의 마른하늘에서 요란하게 비행기가 떨어져 폭발하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독살, 저격, 자살 위장, 의문사 같은 고전적 수법으론 실추한 권위를 세우고 권력을 유지할 충격과 공포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런 충격과 공포를 전하느라 푸틴은 불과 두 달 전 합의를 대놓고 깼다. 반역 혐의를 면하고 안전한 망명을 보장한다던 공개 약속을 한순간에 뒤집는 모습은 마피아 영화에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타협하자고 마련한 협상장에서 테이블 밑의 기관총을 꺼내 상대 조직을 몰살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프리고진은 죽음을 재촉하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애초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쿠데타를 하다 말아 푸틴을 그냥 놔둔 것이었다. 그를 추종하는 텔레그램 채널에 얼마 전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자. 다음엔 무조건 끝장을 봐야 한다.” 어느 조직을 접수할 때 그 두목을 제거해야 후환이 없다는 조폭 세계의 불문율을 저들은 프리고진 죽음의 교훈으로 꼽았다. 정상국가와 조폭 집단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해온 푸틴의 러시아가 이제 명실상부한 ‘마피아 국가’로 전락했음을 이번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이 웅변하고 있다. 공포로 지탱하는 권력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