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만 감정노동자 시대… 서로가 서로의 지옥이다 [이슈&탐사]

국민일보

1200만 감정노동자 시대… 서로가 서로의 지옥이다 [이슈&탐사]

⑤ 타인은 지옥이다

입력 2023-09-25 00:03

“갑질과 감정노동이 만연한 사회가 먹이사슬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혹 그들도 어디에선가 당하지는 않을지….”

지난 19일까지 진행된 국민일보의 ‘갑질-감정노동 실태조사’에 응한 한 간호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모멸감을 느껴야 하고, 관리자의 잘못된 대처 속에서 외로이 고통을 키우는 감정노동은 특정 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일터에서 호소하는 일이 돼 있다. “돈(세금)을 냈다”는 명분으로 끝없이 커진 개인의 권리의식, 노동자보다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일터의 논리 속에서 한국사회 구성원의 관계는 매 순간 갑을의 먹이사슬로 규정되고 있다. 갑질을 한 누군가도 또다른 상황에서는 갑질을 당해 감정노동을 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모든 일터가 닮은 이유

중환자실 간호사 출신인 A씨(27)는 자신이 담당한 한 환자의 보호자로부터 주먹으로 폭행을 당한 뒤 1년 전 일을 그만뒀다. 연로한 데다 인공호흡기를 동반해 치료해야 할 호흡부전 환자라서, 이 환자에게는 3000만원가량의 병원비가 청구됐었다고 한다. 이 환자의 보호자는 A씨를 볼 때마다 욕설하며 항의했다. “돈을 많이 내니 이런 거라도 해야겠다”며 환자를 식별하는 데 쓰이는 팔찌를 면회 때마다 갈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호자는 A씨를 복도로 불러내더니 밀고 주먹으로 폭행했다.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그저 병원비에 대한 화풀이였던 것 같다고 A씨는 말했다.

A씨는 의지하던 수간호사에게 폭행당한 일을 상담했다. 수간호사로부터 돌아온 말은 “네가 만만하게 보여서 그런 것 아니냐”였다. A씨는 이 순간 자신의 꿈을 버렸다고 했다. 3교대 근무를 하며 숱한 민원과 폭언에 시달리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 좋아 버텨온 그였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 수간호사의 말은 A씨에게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는 확신을 갖게 했다.

김석우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정책부장은 “우리의 감정노동에는 교사, 경찰, 콜센터의 일이 모두 들어 있다”고 했다. A씨의 사직 직전 벌어지는 일에는 여러 일터에서 똑같이 벌어지는 갑질과 감정노동의 실태가 집약돼 있다. 돈을 냈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를 마땅한 ‘서비스’로 여기는 고객, 그리고 이젠 뒷전으로 물러나 아픔에 공감하는 대신 노동자 개인 문제로 돌리는 관리자다. 국민일보 실태조사 결과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감정노동자들은 “내 돈 받으면서” “고객인데”라는 폭언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상사들은 때로는 불감증으로, 때로는 고객·원청의 눈치를 보느라 노동자들을 낙담시키고 있었다.

감정노동자들이 울분을 담아 간추린 현실은 “못 참으면 사표, 참고 참으면 극단적 선택”이다. 화를 내는 고객과 ‘무조건 친절’ ‘일단 사과’를 주문하는 일터 사이에서 감정노동자들의 설 곳은 사라져 간다. 감정노동자들의 잦은 퇴직과 이직은 비정규직화, 비전문화, 외주화의 문제로 이어지고, 또다시 감정노동과 퇴직 또는 자살 문제로 악순환한다. 김 정책부장은 “지금 뭔가를 바로잡지 않으면 교사들이 겪는 현재의 비극이 이곳저곳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1200만명의 고통… 나는 자유로운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객 등 제삼자에게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특정 감정을 표현하도록 업무상, 조직상 요구되는 노동형태.’ 이 문장을 읽고 자신의 근무환경이 떠올랐다면 본인은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노동은 육체노동, 정신노동과 같은 노동의 한 종류로 인정받고 있다. 업무 중 고객이란 제삼자를 대하는 노동자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세계적으로 개인주의 가치관이 확대됐고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 개편이 이뤄졌다. 한국에서도 서비스업의 비중이 커져 직무상 고객을 응대하는 감정노동자는 1200만명가량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달 경기 동화성세무서 강윤숙 민원봉사실장이 민원인 응대 과정에서 의식을 잃은 뒤 쓰러졌고 23일 만에 결국 사망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당시 민원인은 부동산 서류 발급 문제로 언성을 높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일보 실태조사 결과 공무원들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앉아서 세금이나 축낸다”였다. 한 민원 응대 공무원은 국민일보에 “민원인을 무조건 ‘VIP’처럼 모시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들은 “누가 죽어야만 이슈가 된다”고 안타까워했고, “딴 사람 얘기”라고 생각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했다. 한국사회의 갑질이 만연하며 감정노동자들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성토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재벌이 화를 내고 비행기를 돌리라고 했다는 뉴스, 경비노동자가 평행주차 차량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마구 때렸다는 입주민의 이야기, 무고성 악성 민원에 시달린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 이후엔 모두가 맹렬히 갑질을 비난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성토한 뒤에도 일하는 실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사람을 대하는 모든 직종은 “점점 힘들다”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한인임 정책연구소 이음 이사장은 “‘고객은 왕이다’를 필두로 기업도 공공기관도 친절도를 평가하고 있다”며 “친절이 전 사회에 배어있으니 노동자들은 통제받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고객들은 진상을 떨게 된다”고 말했다. ‘일단 네가 사과해’를 외치는 관리자 역시 그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갑질을 끊어낼 노동자의 재량권 보장과 정확한 평가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의 정신건강과 극단적 선택 문제가 표면화할 때마다 법과 매뉴얼 마련이 강조되지만, 제도적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모두 예외 없이 갑질-감정노동을 주고받는다는 인식하에 배려하고 물러서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정훈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감정노동자가 1200만명이라는 건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우리는 모두 등을 지고 있지만, 또한 바라보는 관계”라고 했다. 그의 센터는 감정노동자들을 위한 강의 때 “일을 마친 뒤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감정노동을 시키는 것이 아닌지 되짚어 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이슈&탐사팀 정진영 김지훈 이택현 이경원 기자 young@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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