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정치는 사라지고 민생은 실종됐다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정치는 사라지고 민생은 실종됐다

입력 2023-09-26 04:20

해임·체포·탄핵 등 여야 극한 대치가 불러온
헌정사 기록들 대화·타협 없는 정치의 민낯

제1당 내분 후폭풍에 급기야 민생입법 처리 송두리째 무산
오늘 영장심사가 정국 분기점… 협치 의지 없는 여당도 책임 커

민주당은 ‘李리스크’ 정리하고 국민의힘은 진정성 있는 대화나서
의회 정치 조속 복원해야… ‘식물 국회’ 내버려둬선 안 돼

지난주 국회는 헌정사 최초라는 기록을 무더기로 세웠다.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통과, 제1야당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현직 검사 탄핵소추안 통과 등 헌정사 첫 사례들이 한꺼번에 발생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여야 극한 대치가 불러온 상징적 사건들이었다. 한국 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탓이다. 상대방을 향한 적개심으로만 가득 차 있으니 협상과 양보가 비집고 들어설 구석이 없다. 상대방은 제거 대상일 뿐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집권당의 정치력 부재와 제1야당의 입법 독주는 무엇보다 국민의 정치 불신을 더욱 키웠다. 해임건의안과 탄핵소추안도 그렇다.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되거나 헌법재판소의 엄격한 판단을 구해야 하는 것임에도 168석의 더불어민주당은 힘 자랑 하듯 밀어붙여 국민의 염증을 가중시켰다.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과 검사의 검찰권 남용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방탄 물타기’라며 비난만 퍼붓는 여권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는 정치권에 몰아닥친 후폭풍이 급기야 민생마저 실종시켰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로 인한 민주당의 대혼돈은 국회를 올스톱시켰다. 친명계와 비명계 내분이 극에 달하자 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원내 지도부가 총사퇴함에 따라 어제 열려야 했던 본회의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생법안들이 송두리째 공중에 붕 떠버렸다. 14년 만의 국회 통과를 목전에 둔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 중대범죄 피의자의 인상착의 기록사진 공개를 의무화한 머그샷 공개법안, 익명의 산모도 출생신고가 가능하게 한 보호출산제 법안 등이 언제 처리될지 모르는 신세가 돼버렸다. 신임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투표도 미뤄지면서 30년 만에 대법원장 공백 상태가 빚어지게 됐다. 이 모두 국민생활과 직결되는 사안임에도 계파 싸움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현재 정기국회에서 안건 처리를 위한 다음 본회의로 예정된 날짜는 11월 9일이다. 10월에는 국정감사 일정이 잡혀 있다. 이대로라면 한 달 보름간을 기다려야 한다. 오늘 선출되는 민주당 신임 원내대표가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협상해 국감 실시 전인 10월 초에 추가로 본회의 일정을 잡아 민생법안을 긴급히 처리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여야 협상이 순조롭게 재개될지는 불투명하다. 메가톤급 변수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오늘 예정된 이 대표 영장실질심사, 그 결과가 정국 향방의 분기점이 될 터이다.

구속으로 결론 나면 이 대표 사퇴를 요구하는 비명계와 ‘옥중 공천’ 운운하는 친명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 총선 공천권을 손에 쥐기 위한 극렬한 싸움 끝에 자칫 분당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지금도 친명계는 당론이 아닌 자율투표에 맡겨놓고도 체포동의안에 찬성한 배신자들을 색출하겠다는 살벌한 분위기이니 영장이 발부된다면 이 역시 비명계 탓으로 떠넘길 공산이 크다. 그러나 그 책임은 비명계가 아니라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을 파기해 분란의 원인을 제공한 이 대표가 전적으로 져야 한다. 반면에 영장이 기각된다면 봉합 국면으로 전환할 순 있겠지만 당내 수습이 여의치 않을 게다. 여기에 ‘검찰의 정치적 수사’를 둘러싼 여야 대치가 격화돼 총선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정상적인 국회 운영은 쉽지 않겠다.

제1야당의 내홍이 벌어지는 동안 집권당인 국민의힘이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민생 행보에 나서고 있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는 건 도긴개긴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정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생을 해결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걸핏하면 전임 정부와 야당 탓만 하거나 철지난 이념 논쟁을 하니 중도층 민심이 떠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하겠다. 통합과 협치의 의지조차 없다. 무기력 무소신으로 대통령 눈치만 보며 용산 대통령실의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했다는 항간의 비판을 곱씹어봐야 한다.

여야가 민심을 제대로 읽고 국회를 시급히 정상화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민주당은 대표 리더십에 타격을 받은 만큼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면 ‘이재명 리스크’를 과감히 정리하고 공당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의회 정치를 복원시켜야 한다. 국민의힘 또한 야당 내홍에 대해 비난 논평만 남발하지 말고 집권당으로서 진정성 있게 대화에 나서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21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식물 국회’가 돼선 안 된다.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