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열여덟 가지 방식으로 바라보기

국민일보

[너섬情談] 열여덟 가지 방식으로 바라보기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입력 2023-09-27 04:03

누군가를 제대로 돌보는 건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
분석·해석·판단을 내려놓자

주말에 본가에 가니 이제 열두 살이 된 반려견의 걸음이 달라졌다. 간식을 주면 달려오는 속도가 전 같지 않다. 힘차게 흔들거리는 꼬리는 여전히 아기 같은데 어쩐지 모든 움직임이 0.8배속을 한 것처럼 느려졌다. 무릎이 안 좋은가? “병원에서 뭐래?”라고 물어보니 지난달 검진에서 이상 없이 건강하다고 했단다. “잘 돌봐 줘”라고 말을 흐렸지만 마음은 뒤숭숭하다. 나이가 든 거겠지. 깊게 생각하면 자꾸 코끝이 매워진다.

우리 집 두 살 아가의 걸음도 달라졌다. 전엔 몇 번 멈췄다 뛰던 거리를 쉬지 않고 잽싸게 달려간다. 걷는 것만으로 경이로웠던 순간을 지나 참 많이 넘어지던 날들이 쌓여 이제 속도를 논하게 됐다. 헐레벌떡 뒤쫓다 보면 언젠가 따라갈 수도 없이 달아나는 날이 오겠지? 신나게 달려가는 뒷모습이 서운함과 뿌듯함을 같이 몰고 왔다. 주말 사이 목격한 달라진 두 개의 걸음걸이가, 다르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생명이 깃든 것에는 몸짓이 있다. 생명을 돌보는 것은 그 몸짓들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다. 돌보는 사람들은 어제와 달라진 걸음걸이와 평소와 다른 눈빛과 입매를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느리게 걸으면 보폭을 맞추고, 열이 나면 병원에 함께 가고, 입가에 난 뾰루지를 보곤 비타민을 챙겨준다.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일은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돌보다’는 말에 들어 있는 ‘보다’라는 단어의 존재감이 새삼 또렷해진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보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눈이 아닌 모든 감각을 동원해 보는 일이다. 유심히 보고 다정을 행할 때 ‘보기’는 ‘돌보기’가 된다.

스스로를 돌봄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은 지나고 보면 언제나 내가 돌보아지는 시간이었다. 내 기분을 섬세히 살피던 강아지의 눈빛, 옹알이만 할 줄 아는 아가가 오직 눈 맞춤만으로 무수한 말을 건네던 순간들이 나를 키웠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한 뼘 자라났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돌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연결된 존재들이라는 것도 배웠다. 물리적 접촉이나 SNS 친구 맺기가 아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를 연결했다.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응원이 되고, 그 응원이 우리 모두를 돌본다.

‘보다’를 뜻하는 한자가 18개나 있다고 한다. 누군가를 제대로 돌보는 일은 그 열여덟 가지의 방식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관찰하고, 응시하고, 꿰뚫어 보고, 우러러보고, 살펴보다 보면 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눈이 아닌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머리를 넘길 때만 슬쩍 보이는 남편의 새치, 무서울 때마다 입을 네모나게 만들어 울상을 짓는 아이의 표정까지…. 내게만 보이는 장면들이 많아질수록 사랑하는 이들의 데이터가 내 안에 자산처럼 쌓였고, 그들의 변화에 맞출 수 있도록 내 몸짓들이 더 풍부해졌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보지만 제대로 보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들이 있다.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여유가 없어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핑계를 거두고, 내 곁의 이들을 오래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다. 다만 그 속에서 발견한 전과 다른 몸짓이 내 마음을 흔든다면 그 변화에 너무 섣부르게 이름을 붙이지 말고 잠시만 더 바라보기로 한다. 명명하는 순간 박제돼 버리는 감정 때문에 섣불리 안심하거나 불필요한 공포에 위협당하고 싶지 않다. 달라진 반려견의 걸음걸이를 ‘노화’로 압축하지 않기. 새로 생긴 주름에 압도돼 슬퍼하지 말기. 성장의 강박을 버리고 바로 지금의 생생함을 만끽하기.

밝고 커다란 달을 볼 때처럼 상대를 가만히 천천히 바라보자. 분석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상대를 온전히 바라본다면 올 추석에 빛나는 것은 달만이 아닐 것이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성장도 퇴행도 아닌 내 눈에만 비치는 오직 이 순간의 몸짓과 생명력을 누리고 싶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