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살며 사랑하며]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입력 2023-10-11 04:02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열 자리 전화번호에 깃든 애절함은 겨울왕국의 눈처럼 녹지도 않고 마음을 시리게 한다. 그리움이 넘쳐흐를 때면 번호 한자리 한자리를 꾹꾹 눌러 전화를 걸고는 했다. ‘나예요, 보고 싶어요’ 말하고 싶은데 수신인은 여전히 부재중이다. 내 마음은 전화 한 통이면 그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무수한 날들을 놓쳤다는 자책과 그녀의 세상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 오던 날들은 이제 오지 않는다는 공허로 가득했다. 어느 날 반복적으로 울리는 신호음 대신 차갑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회선이 끊긴 것을 알리는 일방적인 통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요지부동한 채로 그녀와의 영원한 단절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독일 심리학자 로란트 카흘러는 “상실감은 마치 나의 사랑을 수정처럼 투명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의식 속에 들어오도록 하나의 점으로 모아주는 볼록렌즈와 같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도 큰 것인지, 해를 거듭할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은 볼록렌즈처럼 선명하게 그녀를 비추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 미안했다. 나는 결심했다. 그녀의 빈자리에 못다 한 내 사랑을 빼곡히 채워 그녀만을 위한 마음의 정원을 만들겠노라고. 당신의 시간은 멈췄어도 나는 당신 사랑하기를 계속할 거라는 약속도 했다. 없는 번호로 전화하는 일을 그치고 휴대전화 번호를 그녀의 집 번호로 바꾼 것도 그 무렵이다.

우리의 이별은 예정돼 있다. 살면서 맺은 인연은 언젠가 사라지고 어떤 감정만 흔적처럼 남게 될 것이다. 사라진 인연을 대신해 무엇이 남을지, 상실 후의 삶은 어떨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가슴 저미는 후회보다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했던 기억이 남길 바라며 오늘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화를 건다. 보고 싶음을 미루지 않고 표현한다.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있음을 전한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